<김호경의 요즘 클래식>지극히 음악적인… 너무나 아카데믹한 지휘봉따라 섬세하게 색채바꾼 앙상블
문화일보
입력 2018-10-08 10:41
수정 2018-10-08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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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먼 래틀&런던 심포니
지휘자에 따라 오케스트라의 소리는 얼마나 달라질까? 음악성이 뛰어나고 세계적으로 명망 있는 지휘자라 하더라도, 객원으로 초청받아 단 며칠을 머무르며, 대여섯 번의 리허설만으로 완전히 새로운 소리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정답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수없이 연주한 곡이라도 처음 만난 지휘자의 결정적 한마디가 연주 방향을 완전히 바꿀 수도 있다. 반대로 끝끝내 서로 통하지 않아 크게 변화된 모습 없이 관객을 맞을 수도 있다.
지휘자가 오케스트라에 상주하거나 주기적으로 연주 활동을 이어가는 관계라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지휘자는 시간을 들여 단원 개개인의 개성을 파악하고, 오케스트라의 장기적 전망을 헤아려 연주곡목을 선정한다. 임기 동안 지휘자와 단원들은 오케스트라의 음악성을 함께 빚어 완성한다. 오케스트라의 성장에 지휘자의 역할은 결정적이다. 한국의 오케스트라가 장기적 안목을 지닌 책임 있는 지휘자를 적극적으로 찾아야 하는 이유다.
지난 1일, 사이먼 래틀이 약 1년 만에 다시 한국을 찾아 서울 송파구 잠실 롯데콘서트홀에서 청중을 만났다. 16년간 재직한 베를린 필의 마지막 아시아 투어를 지휘한 데 이어, 2017/2018시즌 새로 임기를 시작한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LSO)와 내한했다. LSO는 지난해 2월 대니얼 하딩 지휘로 말러 4번을 선보인 이래, 통상 열한 번째 내한이다. 하딩이 이끄는 LSO의 우아하고 매끄러운 연주의 여운을 간직하고 있던 한국 관객이라면 이번 드보르자크 ‘슬라브 춤곡’ Op. 72 1·2·4·7번, 시벨리우스 교향곡 5번 연주는 또 다른 감흥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특유의 맑고 세련된 음색은 여전했지만, 래틀의 지휘봉을 따라 색채를 섬세하게 바꿔가며 더욱 견고해진 앙상블을 보여주었다.
사이먼 래틀이 이끄는 런던심포니오케스트라가 지난 1일 서울 잠실 롯데콘서트홀에서 협연자인 자닌 얀선과 함께 시벨리우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하고 있다. 롯데콘서트홀 제공
특히 시벨리우스 5번에서는, 기쁨의 정서를 발현하는 플루트를 비롯한 목관 파트의 디테일도 뛰어났지만, 관현악곡에서 현악기의 노래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첼로·더블베이스 파트의 무겁지 않으면서도 풍부하고 명징한 표현력이 돋보였다. 래틀의 힘은 여러 가지 가능성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 지극히 음악적이면서도 아카데믹한 해석을 보여준다는 데 있다.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은 네덜란드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 자닌 얀선의 협연으로 펼쳐졌다. 얀선은 뜨겁게 끓어올랐지만, 그녀의 의도가 객석에까지 온전히 전달됐는지는 의문이다. 화려한 테크닉, 풍부한 표현력, 카리스마나 무대매너만큼 협연자에게 요구되는 것이 곡의 설계 능력이라고 본다. 30분이 넘는 대곡을 수십 명의 오케스트라와 맞붙고, 또 화합하는 협연자가 뚜렷한 구상 없이 감정에만 집중한다면 청중은 혼란스러울 수 있다. 얀선은 자신이 지닌 특별한 음악성을 냉정하게 펼쳐내지 못하고 스스로 다소 도취한 듯 보였다. 그녀의 연주를 듣는 내내 아네조피 무터의 이성적인 우아함이나 힐러리 한의 흐트러짐 없는 날카로운 운궁이 자꾸 떠올랐다면 지나친 평가일까.
자국의 오케스트라 앞에 선 래틀은 한층 편안해 보였다. 보수적 성향의 베를린 필에서도 현대 관객을 만족하게 할 만한 참신한 운영 방식을 취했던 그는, LSO에도 새로운 활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디지털화에 공을 들이고, 새로운 관객 유입을 위해 평일 오후 6시 30분에 시작해 중간 휴식 없이 1시간 동안 연주를 선보이는 ‘하프 식스 픽스(Half Six Fix)’ 프로젝트를 기획하는 등 변화를 꾀하고 있다. LSO는 자체 레이블을 운영해 음반 데이터베이스도 체계적으로 구축하고 있다. 이번 공연을 놓쳐 아쉬운 애호가라면 음반을 찾아 듣는 것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