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병권 전국부장

원희룡 제주지사가 지난 8일 “녹지국제병원 공론조사위원회의 병원 운영 불허 권고를 최대한 존중하겠다”고 밝히면서 국내 첫 투자개방형(영리) 병원 개원은 물 건너갔다. 지난 4월 공론화 카드를 꺼낸 당사자가 원 지사인 만큼, 공론화위의 ‘불허 권고’를 뒤집는 것은 자기 부정에 가까운 일이다. 2005년 도입 주장이 제기된 이후 13년간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치르고 가까스로 제주도와 경제자유구역에 한해 제한적 도입을 허용한 영리병원이 막판에 ‘의료 서비스 양극화’란 도그마 덫에 걸려 좌초된 것이다. 합법적 과정과 절차에 따라 건물을 짓고 직원까지 채용한 병원이, ‘민원’이란 탈을 쓴 반대여론에 무릎을 꿇은 지자체장의 눈치 보기로 인해 문을 열지 못하게 된 것이다. 영리병원은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도 허용하고 있는데 말이다.

정부는 혁신 성장을 내세우고 있지만 새로운 도전과 창업이 수포로 돌아가는 일이 많아지고 있다. 승차 공유(카풀) 서비스가 대표적이다. 카풀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은 여객자동차 운수사업법이 예외적으로 유상 운송을 허용한 출퇴근 시간대에 서비스를 제공하거나 기사 알선이 허용된 11∼15인승 승합차를 이용한 차량 제공 서비스를 시도하고 있다. 정상적인 서비스는 규제 때문에 안 되니, 틈새라도 파고들자는 것이다. 하지만 택시업계는 지난 4일 카카오가 카풀 서비스 벤처기업을 인수해 시장에 진출하려 한다며 대규모 반대 집회를 열었다. 전 세계에서 카풀 서비스로 큰 성공을 거둔 우버도 국내에선 불법으로 규정돼 2년 만에 철수했고, 비슷한 서비스를 내놨던 한 스타트업은 국토교통부와 서울시로부터 고발당해 직원 70%를 해고했다. 국내 스타트업 업계에서 승차 공유 서비스는 ‘무덤’으로 통한다.

현 정부가 ‘촛불 혁명’으로 집권한 이후 현장의 목소리를 중시하면서 기득권을 고수하는 목소리가 더 커지는 기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정부는 변화와 혁신을 외치고 있지만, 현실은 정반대로 가고 있다. 기득권 고수가 개인의 권한을 지키는 민주적 권리로 오해되고, ‘떼법’이 직접민주주의인 양 포장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벌어지는 혼란스러운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더구나 공직사회는 적폐청산 광풍이 몰아치며 복지부동의 막장극을 보여주고 있다. 직권남용(5년 이하의 징역)보다 직무유기(1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로 걸리는 게 낫다는 얘기마저 나온다.

12월이면 문재인 대통령은 임기 3분의 1을 지난다.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기 위해 추진했던 정책이 변화와 혁신을 이뤄냈는지, 아니면 의도하지 않았던 부작용을 낳고 있는지 냉정히 따져봐야 한다. 활활 타올랐던 사회적 에너지가 왜 식고 있는지 파악해야 한다. 언젠가 여권의 한 인사로부터 문 대통령의 용기에 대한 평가를 들은 적이 있다. 2012년 대선 후보 시절, 문 대통령은 반대층과 싸울 용기가 부족했지만, 2017년 대선 때는 반대층과 싸우는 용기를 보여줬다고 했다. 그러면서 지지층과 싸울 용기가 부족해 집권 이후가 걱정이라는 얘기를 해줬다. 자유민주주의 원칙을 훼손하고 혁신을 거부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무리 지지층이라 해도 문 대통령이 싸워야 할 진짜 적이다.

ybk@
유병권

유병권 논설위원

문화일보 /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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