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보디 히트
1980년대는 여배우들의 시대였다. 피비 케이츠를 비롯해 브룩 실즈, 데릴 한나, 골디 혼 등의 여배우들은 저마다 다른 종류의 미색(美色)으로 시대를 풍미했다. 캐슬린 터너 역시 1980년대에 잉태된 섹시스타 중 한 명이다. 그의 약력 중 가장 놀라운 점은 위에 언급한 스타들과는 달리 무명의 시간을 거치지 않고 영화 데뷔작부터 주연으로 발탁됐다는 것이다. 터너의 데뷔작 ‘보디 히트’(1981·사진)에서 그는 돈을 위해 한 남자를 유혹해 남편을 살해하게 하는 팜파탈 매티를 연기했다.
이 영화의 배경은 한여름의 플로리다다. 변호사 네드(윌리엄 허트)의 일상은 전혀 의욕적이지 못하다. 지지부진한 사건만 골라 맡아 결국엔 자신의 무능력을 증명하는 일로 그의 하루하루는 소진된다. 그러던 그에게 놀라운 일이 생긴다. 바에서 얼큰하게 취한 채로 더위를 피하기 위해 바닷가를 어슬렁거리던 그의 눈앞에 하얀 원피스를 입은, 마치 속세의 존재가 아닌 것 같은 아름다운 여인이 나타난다. 네드는 담배를 피우고자 멈춰 선 여자에게 말을 건넨다. “더위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만 않는다면 당신의 동행이 돼 드리겠소.” 한심하기 짝이 없는 ‘작업멘트’지만 여자는 대화를 이어간다. 자신을 매티라고 소개한 여자는 네드가 사 준 체리 아이스크림을 가슴에 쏟고 만다. 타월을 가지고 와 직접 닦아 주겠다는 느끼한 멘트를 던지는 남자에게 여자는 가느다랗게 눈을 뜨며 말한다. “핥아 먹어주진 않을 건가요?” 네드의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매티는 자신이 유부녀라며 선을 그었지만 네드는 분명 이 여자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전개가 이쯤 되면 관객은 여자에게 음모가 있을 거라고 추측할 것이다. 여자의 존재가 석연치 않은 이유는 그가 치명적으로 아름답고 관능적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뻔한 스토리를 끌고 가는 동력은 여주인공의 미모이기도 하다. 모두를 홀릴 만한 정도의 미모가 아니라면 이로 인해 수렁에 빠지는 남자도, 그의 복수도 설득력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터너는 설득력이 있고도 남는다. 길쭉한 몸을 잇고 있는 가녀린 목과 작은 얼굴, 긁혀 나오는 듯한 허스키한 목소리는 저항 불가의 마력이다.
매티는 자신에게 완전히 빠진 네드에게 본심을 드러낸다. 남편이 없어진다면 자신이 상속을 받게 되고, 그걸 네드와 나누겠다고 에둘러 말하는 매티의 뻔한 거짓말에 네드는 망설임 없이 그의 수족(手足)이 된다. 폭탄을 구해 매티의 남편을 살해한 네드는 매티와의 여생을 꿈꾸던 순간 깨닫는다. 처음부터 매티가 남편을 살해할 목적으로 자신을 유혹했고, 자신이 살인자로 지목당하게끔 단서를 심어놓았다는 것을. 결국 네드는 법의 심판을 받는다. 이 영화는 고전 누아르 ‘이중배상’(감독 빌리 와일더·1944)을 오마주했으나 완성도와 심리묘사는 원작에 못 미친다. 다만 원작을 능가하는 것이 하나 있다면 바로 터너다. 바버라 스탠윅 이상으로 거부할 수 없는 팜파탈은 터너가 아니면 불가능했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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