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녀

임상수 감독의 2010년 작 ‘하녀’(사진)는 김기영 감독이 1960년에 만든 동명 영화를 리메이크했다. 김 감독이 자신의 영화에서 캐릭터와 주요 플롯을 활용해 ‘화녀’(1971), ‘충녀’(1972), ‘육식동물’(1984) 등 몇 차례 리메이크한 것을 제외하고, 다른 감독이 한 리메이크로는 첫 번째인 셈이다.

임상수 버전의 ‘하녀’가 원작과 가장 차별화되는 지점은 남녀 주인공의 설정이다. 원작에서 하녀가 일하는 주인집의 남자는 피아노 선생으로, 재봉일로 생계를 꾸리는 아내보다 무능한 남편이었던 반면, 2010년 작 ‘하녀’에서 남자는 재벌기업의 후계자로 설정돼 절대적인 권력자로 군림한다.

늦은 시간까지 식당에서 일을 하고 숨쉬기도 힘든 고시원에서 친구와 사는 은이(전도연)는 지인의 소개로 재벌가의 하녀로 들어가게 된다. 평소에 입지도 않던 원피스에 구두를 신어야 하는 겉치레가 불편하기 이를 데 없지만 은이는 으리으리한 집에서 산해진미로 가득한 식탁을 오가며 일하는 것이 싫지 않다. 출산을 앞두고 있는 주인집 여자 해라(서우)는 표독스럽게 생겼지만 친절한 척 은이를 대한다. 그러나 대저택과 성찬보다 은이를 더 설레게 하는 요소는 주인집 남자 훈(이정재)이다. 아침마다 피아노를 치고 저녁에 귀가하면 와인과 클래식 음악으로 시간을 보내는 훈은 은이가 생각했던 ‘하이 클래스’의 표본이자 같은 종(種)이지만 만질 수 없는 성배(聖杯) 같은 존재다.

김효정 영화평론가
김효정 영화평론가
은이를 이 집으로 데려온 병식(윤여정)은 오랫동안 집안일을 맡아 해오며 감정이 쌓인 듯 ‘아더매치’(아니꼽고, 더럽고, 매스껍고, 치사하다)라고 불평하지만 은이는 그럭저럭 적응해 나간다. 해라와 훈이 딸 나미를 데리고 별장으로 주말여행을 떠난 날 은이는 나미의 보모로 동행하게 된다. 가족의 치다꺼리로 긴 하루를 보낸 은이는 마침내 자신의 숙소에 지친 몸을 누인다. 은이가 잠이 들려고 할 때 훈이 와인 한 병을 들고 은이 방에 나타난다. 놀라서 벌벌 떠는 은이 앞에서 훈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잔에 와인을 따라 내민다. 은이는 와인을 받아 마시고 훈을 올려다본다. 은이의 전 재산보다 비싼 와인 한 모금은 일종의 ‘제안’인 셈이다. 성찬식의 와인이 예수의 피를 상징하듯 훈이 따라 준 와인은 그의 전지전능한 육체와도 같다. 감당해야 할 희생을 모른 채 은이는 그의 육체를 받아 마신 것이다.

무언가에 홀린 듯 은이는 훈의 바지를 내리고, 그의 성기를 덥석 문다. 게걸스럽게 전율하는 은이의 오럴섹스 장면은 에로틱하다기보다 동물이 먹이를 탐닉하듯 원시적이다. 하녀와 주인의 관계는 이 장면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양팔을 벌리고 서서 심취해 있는 훈과 그 아래에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은이의 자세는 계층을 전복할 수 없는 남녀를 보여준다. 당시 영화 재현의 수위와 검열을 고려했을 때 이런 종류의 장면이 원작에서는 통용될 수 없었을 것이다. 원작과 비교했을 때 임상수의 리메이크 버전은 전례 없는 파격적인 성 묘사를 시도함에도 훈의 ‘무소불위’ 권력을 상징적으로 부각하는 장치 이상으로 기능하지 않는다.

성역에 가까운 ‘육체’를 마신 죄로 은이는 희생된다. 훈과 몇 차례의 관계를 가진 은이는 아이를 갖게 되고, 이를 알게 된 해라와 그의 엄마는 병식과 공모해 강제로 낙태시킨다. 이들에 의해 아이를 잃은 하녀는 복수를 결심한다. 검은 상복을 입고 해라의 출산을 축하하는 가족 앞에 나타난 은이는 “날 잊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샹들리에에 목을 매달아 자살한다. 모두가 경악하는 순간 은이의 몸은 불에 탄다. 이 영화가 남긴 의문은 ‘이 결말을 진정한 복수로 볼 수 있는가’이다. 하녀가 목을 매고 분신하는 이 영화의 결말은 1960∼1970년대에 성행했던 ‘여귀’ 공포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그때도 지금도 억압받은 자의 한은 풀리지 않은 채 그들은 ‘날 잊지 말라’는 말을 하기 위해 끊임없이 귀환한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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