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드루 와이어스 ‘크리스티나의 세계’, 캔버스에 템페라, 32.3×48.8㎝, 1948년. 뉴욕현대미술관 소장
전준엽이 만난 美感의 세계 - (3)‘서정’으로의 회귀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왔던 힘 감동 통해서 인류지지 이끌어 보편적 가치 20세기에 재평가
19세기 미술양식 ‘라파엘전파’ 밀레이‘낙엽’등장하는 소녀들 인생을 보는 다양한 시선 담아
와이어스 ‘크리스티나의 세계’ 고독과 다른 세계 갈망 드러내 영화 한장면 같은 극적 서정美
호퍼作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 적막해진 밤 도시의 묘한 매력
2010년 5월. 유럽 음악계는 한국의 젊은 작곡가를 주목했다. 세계 3대 국제 음악콩쿠르 중 하나인 퀸엘리자베스 국제 음악콩쿠르는 작곡부문 대상 수상자로 학생 신분인 한국 작곡가 전민재를 선정했다. 이 콩쿠르 역사상 역대 최연소라는 기록까지 남기며. 축구로 치면 월드컵 우승과도 비견되는 쾌거였다. 당시 한국 매스컴은 남아공월드컵 열기로 소홀히 다룬 데 비해, 일본 언론은 현지 인터뷰까지 하며 ‘아시아의 젊은 음악가가 서구 음악의 심장을 강타했다’고 관심을 보였다. 유럽 음악계는 왜 무명의 한국 작곡가를 주목했을까. 현지 언론은 ‘형식 실험과 얄팍한 아이디어에 지친 현대 음악이 새로운 서정을 선택했다’고 평했다. 23세의 한국 작곡가가 독학으로 일궈낸 음악의 새로운 코드는 ‘서정’이었던 것이다. 20세기 중반을 넘어서면서 예술의 새로운 화두로 떠오른 것은 서정의 회복이다. 예술가들이 서정을 회복하겠다니. 그러면 그동안 예술에서 서정을 버렸다는 말인가. 그렇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예술 지고의 가치는 ‘새로움’이었고, 이를 위한 끊임없는 형식 실험이 이뤄졌다. 미술이 선봉에 있었다. 아이디어만 있으면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었다.
존 에버렛 밀레이 ‘낙엽’, 캔버스에 유채,104.1×73.7㎝, 1855∼1856년. 맨체스터 갤러리 소장
인간 본성인 감성을 자극해 아름다움을 완성하는 서정성은 타고난 기질에서 나온다. 그게 예술적 재능이다. 서정성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으며, 그런 감동의 힘으로 인류의 지지를 이끌어 냈다. 이를 자양분 삼아 자라난 예술은 튼실한 몸체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20세기에 들어 서정성 대신 예술의 동력으로 들어앉은 것은 ‘아이디어’였다. 아이디어는 어떤 것이라도 용납됐다. 새로움을 찬양하는 것이라면. 추악한 것, 더러운 것, 파괴적인 것, 부도덕한 것, 잔인한 것, 끔찍한 것, 엽기적인 것도 새로움의 논리로 포장하면 예술이 됐다. 심지어 생명을 경시하는 행위조차도 수준 높은 예술로 둔갑하는 세상이 됐다.
서정성은 미술에서 존재 이유 중 비중이 가장 높았음에도 미술사 변방에 머물러 있었다. 그 이유는 논리를 중히 여기는 서양의 합리적 기질이 미술사를 이끌어 왔기 때문이다. 르네상스가 역사의 수면 위로 뿜어 올린 과학적 사고는 미술의 윤활유 격인 서정성을 증발시켜 버렸다. 결국 건조한 미술이 미술사의 중심 동력이 됐던 것이다.
르네상스 이후 서양미술사를 이끈 것은 형식 개발에 의한 양식의 변천이었다. 즉 바로크-로코코-고전주의-낭만주의-신고전주의-사실주의-인상주의로 편도 1차선 같은 흐름이 19세기까지 이어졌고, 20세기에 들어와 형식의 난개발이 불러온 백화점식 미술사가 나타나게 됐다. 이 중 서정성이 스며든 것은 로코코와 낭만주의 정도다.
그런데 서정을 본분으로 삼은 미술은 꾸준히 있어 왔다. 미술사의 곁가지처럼 자라면서 서정의 힘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20세기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재평가되기 시작됐다. 서정성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예술의 본분이 시간을 뛰어넘어 보편적 가치에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이게 이 시대 새로운 예술 코드인 ‘서정적 전위’다.
에드워드 호퍼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 캔버스에 유채, 84.1×152.4㎝, 1942년. 시카고미술관 소장
서정의 힘을 보여주는 미술 중 대표적 흐름은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미술양식인 ‘라파엘전파’다. 르네상스 이전 시대 회화어법을 따르겠다는 의지를 담은 이름이다. 즉 르네상스 회화의 상징적 화가인 라파엘 이전 회화 양식을 새롭게 계승하겠다는 뜻이다.
서정의 힘을 보여주는 라파엘전파의 그림을 보자.
창밖에 가득히 낙엽이 내리는 저녁/ 나는 끊임없이 불빛이 그리웠다/ 바람은 조금도 불지를 않고 등불들은 다만 그 숱한 향수와 같은 것에 싸여가고 주위는 자꾸 어두워 갔다/ 이제 나도 한 잎의 낙엽으로 좀 더 낮은 곳으로, 내리고 싶다. -황동규 ‘시월 6’
바람결이 스산해지기 시작하는 계절에 읽으면 가슴 아리게 만드는 시다. 가을바람처럼 가슴 시리게 하는 그림도 있다. 시적 감성이 풍부한 그림으로 독창적 회화세계를 구축한 존 에버렛 밀레이(1829~1896)의 ‘낙엽’이다. 낙엽을 메타포로 인생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았다.
여기서 낙엽은 예상한 대로 쇠락, 그리고 죽음을 암시한다. 태양이 빛을 잃은 서늘한 저녁 하늘 그리고 낙엽 태우는 연기는 황혼기 삶과 인생의 덧없음을 일깨우는 설정이다. 가을 저녁 같은 세월을 고스란히 안고 바라보는 인생은 이 그림처럼 스산할 것이다. 그런 심정을 부추기는 이미지로 작가는 소녀들을 등장시켰다. 낙엽을 끌어모아 태우는 소녀들은 청순하고 예쁘다. 젊은 소녀와 쇠락한 낙엽이라는 상반된 세월의 이미지를 가을 저녁 풍경으로 연출해 인생의 덧없음을 강조한다. 황혼기 삶의 무게를 애수 어린 풍경으로 그리게 된 동기는 당시 교류를 가졌던 시인 앨프리드 테니슨의 영향이었다. 가을의 우울한 분위기를 즐겼던 밀레이는 특히 낙엽 태우는 냄새에서 영감을 얻기도 했다. 해가 막 지평선을 넘어간 시간, 낮과 밤의 교차점이다. 밀레이는 이런 저녁 풍경에서 삶과 죽음의 중간 참의 환상을 봤던 것이다.
낙엽 더미를 둘러싼 네 명의 소녀들은 각각 다른 표정을 짓고 있다. 왼쪽 끝 소녀는 이 일과는 무관하다는 얼굴이다. 정면을 보고 있지만, 초점이 불분명하다. 낙엽을 더미 위에 올려놓는 소녀는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 이 세상 너머의 세계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듯. 그 옆의 소녀는 눈을 감고 있는데 명상적 분위기를 풍긴다. 그리고 작은 소녀는 타는 낙엽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다.
인생을 바라보는 각기 다른 시선 또는 삶의 방식을 표현하려는 의도다. 모두가 다른 삶이지만 똑같은 죽음을 맞는 것이 인생이라는 엄숙한 진리를 말하고 있다. 그런 생각은 이 그림의 메타포인 낙엽 더미가 봉분을 연상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확연하게 보인다.
가장 미국적인 것은 무엇일까. 코카콜라나 프로스포츠, 할리우드 영화, 팝송이 떠오른다. 물론 이것들은 미국적인 것과 바로 연결되는 이미지다. 그러나 미국인의 마음속에 스며 있는 가장 미국적인 것은 서부영화에 등장하는 시골 풍경이다.
미국 극사실주의 화가 앤드루 와이어스(1917~2009)가 그리는 세계는 미국 역사인 서부개척사의 숨결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시골 풍경이다. 이런 이유로 그는 미국의 국민화가로 추앙받고 있다. 그의 대표작 ‘크리스티나의 세계’는 미국인 마음속 고향 같은 정서가 잘 배어 있는 그림이다.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오르게 하는 극적 서정미가 돋보이는 이 그림의 무대는 와이어스 자신이 30여 년간 작업실로 썼던 집 주변이며, 인물은 친구 아내인 크리스티나 오슬론이다. 소아마비였던 그녀는 삶의 대부분을 이 그림에 나오는 집에서 지냈다고 한다. 와이어스는 크리스티나의 폐쇄적 삶에서 모티브를 얻어 이 그림을 그렸다. 인간이 원래 갖고 있는 고독과 그것으로부터 벗어나 다른 세계로 나아가려는 갈망, 이 두 개의 상반된 욕구가 빚어내는 현실적 불안감을 예사롭지 않은 서정성으로 풀어냈다.
마른풀로 가득 찬 들판, 크리스티나는 불안한 자세로 지평선에 걸쳐 있는 자신의 집을 바라보고 있다. 정지된 풍경처럼 고요하게 보이는 공간 속에 한 줄기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훑고 들판 건너 집안 마당 빨래를 펄럭 젖히고 지평선으로 넘어간다. 몸이 불편한 여자가 돌아갈 곳은 집밖에 없다. 지평선 너머로 가보고 싶은 마음을 바람에 담아 표현하고 있다.
도시는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회색과 직선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낮은 냉정한 이성의 세계다. 어둠과 불빛이 화려한 조화를 이루는 밤은 촉촉한 감성에 젖는 시간이다. 특히 인적 끊긴 깊은 밤 도심은 적막하지만 묘한 매력을 준다. 도시에서만 느낄 수 있는 특별한 서정이다.
전준엽 화가·미술저술가
도시인의 가공된 정서를 냉정한 시선으로 그려내 도회 감성적 사실주의를 완성시킨 이가 에드워드 호퍼(1882~1967)다. 대표작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은 20세기 서정의 아이콘으로 불릴 정도로 뛰어난 작품이다. 그가 54년간 살았던 맨해튼 그리니치빌리지의 식당이 무대다.
인적 끊긴 도심 한 모퉁이. 자정을 훨씬 넘긴 간이식당에 밤을 잊은 사람들이 앉아 있다. 헛헛함을 달래기 위해. 종업원과 이야기를 나누는 남자는 여자와 동행으로 보인다. 그들은 슬며시 손을 잡으려 한다. 건너편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는 남자는 혼자다. 뒷모습의 검은 실루엣에서 짙은 외로움이 흐른다. 깊은 밤 서울 도심을 걷다 보면 만날 수도 있는 정경이다. 적막하지만 애수 같은 감성이 묻어나온다. 그림을 보고 있으면 빌리 조엘의 ‘더 스트레인지’ 서두에 흐르는 휘파람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도시적 서정이다.
이 그림은 설명 없이도 작가의 의도가 읽힌다. 영화 장면 같은 구성 때문이다. 관람자는 멀리 떨어져서 장면을 바라보게 된다. 영화 스크린에 나타나는 영상을 일정한 거리의 객석에서 바라보듯이. 간이식당 도로 건너편쯤은 될 것이다. 객관성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다. 굳이 참견하지 않고 그저 바라만 보겠다는 심산이다. 도시인들이 느끼는 정서의 간격이다. 쿨한 정서다.
도시인은 비나 눈, 바람을 맞지 않는다. 거대한 사무실 창문이나 아파트 베란다에서 바라보는 것을 즐긴다. 갓 내린 원두커피 향이 은은히 퍼지는 2층쯤 되는 카페의 넓은 창으로 바라본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순 없겠지. 그렇게 바라보면서 혼자만의 생각에 잠긴다. 추억 같은 것이겠지. 이 그림을 보고 추억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낯설었던 도시의 밤 풍경과 스쳐 갔던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