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일본은 1965년 ‘기본관계조약’과 청구권협정 등 4개 부속 협정을 체결하고 해방 및 일본제국 패망 20년 만에 국교를 정상화했다. 당시 양국 모두에서 강한 불만이 제기됐지만, 함께 미래를 열어가야 한다는 공감대를 앞세워 어렵게 양국 정부가 결단했으며, 그 뒤 반세기 이상 한·일(韓日) 관계의 근간으로 작동해왔다. 그런데 강제 징용과 관련된 대법원 판결을 놓고 일본이 청구권협정에 대해 상반된 입장을 보임으로써 양국 관계의 뿌리부터 흔들릴 가능성이 커졌다. 여기에다 위안부 합의 파기 파문까지 겹쳤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30일 2005년 징용 피해자 4명이 신일철주금(일제 당시 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재상고심에서 “신일철주금은 1억 원씩 배상하라”고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대법원은 청구권협정에는 강제징용 피해 보상금이 포함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이다. 다만, 13명의 대법관 중 권순일·조재연 대법관은 ‘청구권협정을 무효로 볼 것이 아니라면 그 내용이 좋든 싫든 지켜야 한다’면서 ‘일본 기업이 아닌 대한민국 정부가 징용 피해자에게 정당한 보상을 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예상대로 일본 측은 ‘양국 및 국민의 청구권 문제가 완전히 최종적으로 해결됐다’는 조문을 근거로 내세우며 강력 반발하고 있다.

역대 정부는 청구권협정으로 개인의 손해배상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취해왔다. 2005년 노무현 정부는 민관합동위원회에서 일본 자금 중 무상 3억 달러는 징용피해 보상이 감안된 것으로 보고 피해자 7만여 명에게 6200억 원을 지급했다. 이번 소송과 관련해서도 1, 2심 재판부는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으나 2012년 대법원이 하급심의 결론을 뒤집었고, 그 뒤 6년 만에, 소송 청구 시점 기준으로는 13년8개월 만에 국내법적 판단이 완성됐다. 현재 전국 법원에서 관련 소송 14건이 진행중이다. 대법원이 시효도 인정하지 않음에 따라 징용 피해자 15만 명과 다른 사건 관련자도 소송을 제기할 길이 열림으로써 일파만파로 번질 수도 있다.

식민지배의 참담함을 생각하면 이번 판결도 국가적 한(恨)을 풀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그러나 일본이 동의하지 않고, 미래를 위해 양국이 협력해야 한다는 엄연한 현실이 있다. 전쟁으로 상대국을 제압하지 않는 한 외교로 절충할 수밖에 없다. 문 정부의 국익 외교 역량이 시험대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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