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년 전 실종된 학생의 유골이 발견됐던 고려대 본관 건물. 오탁번 작가는 이 충격적인 사건에서 영감을 얻어 소설 ‘굴뚝과 천장’으로 완성했다. 1934년 준공된 본관 건물은 고려대를 상징하는 건축물로 사적 제285호다.  신창섭 기자 bluesky@
11년 전 실종된 학생의 유골이 발견됐던 고려대 본관 건물. 오탁번 작가는 이 충격적인 사건에서 영감을 얻어 소설 ‘굴뚝과 천장’으로 완성했다. 1934년 준공된 본관 건물은 고려대를 상징하는 건축물로 사적 제285호다. 신창섭 기자 bluesky@

오탁번 소설 ‘굴뚝과 천장’의 배경 고려대학교

11년전에 실종됐던 대학생이
다락방 강의실 천장서 발견된
신문기사서 소설 모티브 얻어

작가가 재학하던 시절과 겹쳐
대학생활의 단면 작품에 투영
잠적한 젊은이의 궤적 재구성

4·19혁명서 5·16쿠데타까지
혁명 이끈 지성인들의 좌절과
역사의 소용돌이 상황 그려내

한일협정·10월유신 겪으면서
反독재 시위 주도했던 고려대
휴교령‘긴급조치’내려지기도


소설 ‘굴뚝과 천장’은 1973년(‘현대문학’, 3월호)에 발표한 작품이다. 그 후 나의 첫 창작집 ‘처형의 땅’(일지사, 1974)에 수록돼, 사회적 변혁과 문학이 역사 자체가 될 때의 역비례 관계에 대한 성찰을 최초로 형상화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소설은 1972년 4월 4일 화요일 조선일보 석간(제15688호)에 보도된 ‘11년 전에 실종된 고대생, 뼈만 남은 시체로 발견’이라는 기사를 소재로 해 쓴 작품이다. 그 기사를 처음 보았을 때, 이거야말로 한 편의 소설이라는 강한 느낌을 받았다. 기사를 가위로 오려서 노트에 붙여놓고 틈틈이 되읽으면서 소설의 배경과 등장인물의 밑그림을 그려나갔다. 시체가 발견된 장소가 다름 아닌 모교의 본관 3층 위에 있는 다락방 강의실의 천장 속이라는 사실에 나는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전기공사를 하던 학교 전기공이 학생의 시체를 발견했는데 상의 주머니에 들어있는 학생증으로 신원이 확인됐다. 정치외교학과 2학년 허모(당시 21세) 군이었다. 1961년 1월 집을 나가서 한 달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자 가족과 학교 당국에서 실종 신고를 했지만 다 허사였다. 지붕과 천장 사이의 높이 1.2m 되는 좁은 공간에 반듯이 누운 자세였는데 뼈만 남은 상태였고 곁에는 음독한 것으로 보이는 약병 한 개와 낡은 영어책 한 권이 놓여 있었다.

본관 3층 위에 있는 다락방은 내가 재학 중에도 가끔 강의실로 사용되기도 했지만 천장이 너무 낮아서 키 큰 교수가 강단에 서면 머리가 천장에 부딪힐 정도였다. 마름모꼴 모양의 작은 창문 밖에는 비둘기들이 날아들어서 비 오는 날이면 캠퍼스 곳곳에 숨어있던 최루탄 가스와 비둘기 똥 냄새도 심하게 나는 그런 공간이었다. 천장 위로 올라가는 작은 통로가 있었던 모양이지만 학생들은 아무도 그 사실을 몰랐다.

재학 시절인 1964년 나도 그 다락방 교실에서 몇 번 강의를 들은 적이 있었다. 학점을 따도 그만 안 따도 그만인 무슨 무슨 개론 강의가 개설되곤 했으므로 학생들은 강의를 듣는 둥 마는 둥 제멋대로였다. 등록금을 내느라고 쩔쩔매고 있던 나는 학교를 끝까지 다녀야 하나 당장 때려치워야 하나를 놓고 고민하고 있던 시기였다. 매 학기 학생운동의 격랑이 몰아치던 시기였다. 바로 그 시간에도 실종된 ‘그’는 다락방 천장 속에 죽은 채 누워 있었던 것이다. 나의 대학생활의 단면들이 그대로 서사적 구조의 배경이 돼 작품 속에 투영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발단-전개-갈등-위기를 거쳐 대단원에 이르는 서사구조 속에 작품의 주인공인 ‘그’와 작가인 ‘나’의 인생관도 고스란히 들어 있는 것이다.

내가 대학 1학년일 때 춘천 D여대의 기숙사 굴뚝에서 여대생이 투신자살한 사건이 신문에 보도된 적이 있었다. 나는 그 여대생을 ‘R양’으로 설정해 11년 만에 천장에서 발견된 ‘그’와 대비하기로 했다. ‘R양’을 부정선거를 저지른 집권당 유력자의 딸이라 가정하고 안일한 타협과 굴종을 질타하는 소설 속의 ‘그’의 저항정신과 현실 부정의 태도에 긴장감을 배가시키는 보조인물로 삼기로 했다.

D여대 기숙사에 가서 ‘R양’이 투신자살한 굴뚝을 답사하고 온 ‘그’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까지는 그래도 무엇을 기다린다는 뼈 아픈 꿈이 있었지. 그런데 이젠 뭐야? 무엇을 기다리지? 지금 나라 꼴을 보게. 학생들이 피를 흘려 가며 쟁취한 민권이 아닌가. 그런데 정치인은 정치인대로, 노동자는 노동자대로 학생혁명을 아전인수하기에 혈안이 돼 민주민생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거야.”

‘굴뚝과 천장’을 쓴 1973년 나는 ‘처형의 땅’(대한일보, 1969)으로 등단한 지 5년이 채 안 된 신인 작가였지만 한국의 현실 정치와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투쟁하다가 역사의 그늘 속에서 소멸하는 순수한 지성인들의 희생을 부각시켜야겠다는 뚜렷한 작가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1960년 3·15 부정선거, 4·19 학생혁명, 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이어지는 역사의 소용돌이로 나의 서사적 상상력이 빠르게 줄달음치고 있었다. 4·19 학생혁명과 5·16 군사쿠데타 사이의 역사적 공간에다가 자신을 내던져 놓고 11년 동안 잠적해 있던 젊은이의 궤적을 소설로 재구성했다.

‘굴뚝과 천장’을 쓸 때 나의 신분은 육군 중위였다. 현역 시절인데 어떻게 이런 소설을 쓸 수 있었을까. 나는 그때 대학원 국문과에서 석사 학위를 받고 1971년 여름에 입대해 훈련을 마치고 중위로 임관돼 태릉 육군사관학교에서 국어과 교관으로 복무하고 있었다. 병역은 국방의 신성한 의무인 동시에 젊은이의 청춘을 가로막는 장벽 같은 것이었다. 나는 육사 생도들에게 교양 국어와 작문을 가르치면서 병역과 창작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작품의 시대적 배경은 실종 대학생의 생애에 맞춰 3·15 부정선거와 4·19 학생혁명으로 설정했다. 1961년 실종된 후 11년 만에 발견된 대학생의 실제 시간대와 일치시켰다. 학생혁명으로 독재정권은 무너졌지만 정치인들은 분열과 대립을 일삼으며 오로지 혁명의 열매를 따 먹는 일에만 몰두할 뿐 민생에는 아랑곳하지 않았고 사회 각 단체는 자기들의 주장과 이익만을 내세우면서 격렬한 시위를 이어가고 있었다. 학생혁명을 지지하던 국민은 허탈과 좌절 속에서 자포자기의 심정이 됐다. 급기야 군부가 정변을 일으켰다. 길고 긴 암흑의 시대가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4월 혁명의 도화선이 됐던 고려대 학생들의 4·18 의거는 학생들에게 한없는 긍지와 사명감을 동시에 안겨준 역사적 사건이었다. 1961년 4월 고려대 4·18 기념탑 제막식에 당시 민주당 정권의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국무총리와 곽상훈 국회의장이 참석해 치사를 한 사실만 보아도 고려대 학생들이 이끈 학생운동의 역사적 중요성을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고려대는 반독재투쟁의 성지나 다름없었다.

1964년에 시작된 나의 대학생활은 한일협정과 삼선개헌 그리고 10월 유신이라는 최악의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있었다. 고려대 학생들이 독재정권에 항거하는 시위를 주도해나가자 대통령 긴급조치로 유독 고려대에만 휴교령을 내린 적도 있었다. 아예 고려대를 폐교시키려는 음모도 진행되고 있다는 흉흉한 소문도 나돌았다.

‘굴뚝과 천장’이 발표되자 중앙일보 소설 월평에서 평론가 김윤식 교수가 실로 오랜만에 접하는 문제작이라면서 “3월은 작품 하나가 있어서 뻐근하다. 이 한 줄을 써놓고 나는 이달의 소설평을 끝내어도 좋다고 생각한다”라고, 그야말로 뻐근한 평을 했다. 예술작품이 본질적으로 내포하는 가장 곤란한 패러독스에 관련돼 있다는 점과 사회적 변혁과 문학이 역사 자체가 될 때의 역비례 관계에 대한 성찰을 최초로 형상화했다는 점에서 문예비평의 본문에 해당한다는 평가를 한 것이다.

기성세대의 권력 야욕과 위선에 절망해 굴뚝에서 투신한 ‘R양’과 학생혁명의 선두에 섰다가 혁명이 성공하자 그 열매를 정상모리배들이 독점하는 세태에 절망하고 역사의 현장에서 잠적해버리는 ‘그’는 다 같이 역사의 주동자였다. 그를 그저 지켜보면서 안일한 타협으로 자유와 정의를 외면하는 ‘나’는 단순한 역사의 기록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들은 모두 인간 본성의 적나라한 원형이다. 그러나 나는 ‘나’가 아니었다. 나는 ‘그’였다. 대학 등록금도 제때에 내지 못해 매 학기를 마지막 학기라는 각오로 대학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극한의 처지였다. 자살을 꿈꾸지 않은 날이 없을 정도로 처절한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나의 목을 옥죄고 있는 병역문제의 미해결은 나를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처절했을 것이다. 왜 내가 부잣집 놈들의 집과 땅을 지켜 주느냐. 돈 많은 네놈들이나 군대에 가라. 이게 당시 신춘문예에 동화와 시가 당선되고 또 이어서 소설이 당선된 청년 문인 오탁번의 무쌍한 각오였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몽니는 자살할 날 잡아놓은 놈이 아니고는 엄두 못 낼 치기였다. 문학적 상상력으로 감칠맛 나게 덧칠해 놓은 몽상이 아니었다. 골치 아픈 병역문제는 대학원 진학 후 육군사관학교 교관시험에 합격하고 나서 기적처럼 깨끗하게 해결됐다. 2년 후 석사학위를 받고 교관 후보생으로 입대하게 됐던 것이다. 그때부터 나의 학문과 창작 세계가 활짝 열린 셈이었다.

오탁번 소설가·시인·고려대 명예교수
오탁번 소설가·시인·고려대 명예교수
대학원 공부가 마음에 하나도 안 들었지만 병역문제까지 겹쳐 있으므로 쉽게 포기할 수도 없었다. 1970년 정지용 연구로 석사논문을 썼다. 당시에 정지용은 금기 대상이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논문을 썼다. 논문을 트집 잡아서 잡아갈 테면 잡아가라는 배짱이었다. 병역문제도 잘 해결됐으니 이제 현실에 순응해도 되련만 나는 타고난 반항 정신을 버리지 못했다. 1974년에 발표한 ‘우화의 집’은 1972년 10월에 단행된 10월 유신을 톡 까놓고 풍자 비판한 작품이다. 이런 작품을 쓰고도 곤욕을 안 당한 나를 보고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더구나 나는 그때 현역 대위였다. 내 운명을 걸고 도박을 한 셈이었다.

요즘 나는 소설가 오탁번을 다시 만나고 있다. 젊은 날의 네거티브 필름을 보고 있는 것 같다. ‘오탁번 소설’의 궤적을 따라 아득한 시간여행을 하고 있다. 작품 하나하나가 저마다 숨을 쉬고 있다. 문학작품의 유효기간은 무한대다.

‘처형의 땅’의 등장인물인 ‘우리들 중의 하나’가 나의 다면적 자화상이라면 ‘굴뚝과 천장’의 ‘그’ 또한 지울 수 없는 나의 자화상이라고 볼 수 있다. 작가의식 속에는 한마디로 단정할 수 없는 신비스러운 패러다임이 있다. 악마와 천사가 가위바위보하고 소년과 노인이 숨바꼭질하는 곳, 이것이 나의 문학적 영토의 암사지도다. 나의 영혼 속에는 시와 소설이 회전하며 존재한다. 시와 소설은 대립개념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의 시에는 앙증맞은 서사가 들어가기도 하고 또 소설의 어느 부분을 따로 떼어내면 그대로 시가 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오탁번 소설가·시인·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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