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하철만 타도 불쾌지수 높아져
옆 사람 의식 않고 큰소리 통화
일본 사람 친절·청결·질서의식은
타고난 것 아닌 지속적 교육 결과
앞세대 절박하게 사느라 그랬지만
요즘 세대는 폐 끼치는 일 자제해야
‘원려(遠慮) : 먼 앞일까지 미리 잘 헤아려 생각함. ≒원념(遠念)’
국어사전에 있는 단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잘 쓰이지 않는다. 심모원려(深謀遠慮)라는 말은 쓰이지만, 원려라는 단어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사어에 가깝다. 그만큼 일상생활에 적용되지 않기 때문일까? 일본에서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이 단어를 ‘엔료’라는 현지어로 듣게 된다. 멀리 고려해 달라는 말이지만, 실제로는 ‘남에게 폐를 끼칠 수 있는 일은 하지 말아 달라’는 말이다. 그래서 원려라고 하면 대개 일본어라고 생각하겠지만, 실은 우리말이기도 하다.
대중 교통수단을 주로 이용하는 나는, 지하철에서 남들이 나에게 끼치는 많은 폐를 겪으며 차오르는 불쾌지수를 낮추기 위해 심호흡을 하곤 한다. 지금 지하철을 타러 내려간다고 생각하고 동선을 그려 보자. 역 구내 통로에서 우측통행 규칙을 지키지 않고 당당히 걸어오는 사람들을 피해 다닌다. 심지어 휴대전화에 시선을 고정하고 걸어오는 사람도 많다. 물론 내가 피하지 않아서 서로의 어깨가 부딪친다 해도 내가 그다지 피해를 볼 체격은 아니지만 그래도 불쾌해지기 싫어서 피해간다. 계단을 내려간다. 마침 전동차가 도착해 많은 사람이 계단으로 올라온다. 반대편 사람들을 위한 단 한 줄의 여유도 남겨주지 않고 그 넓은 계단을 가득 메우고 올라오는 사람들. 벽에 붙어 선 나를 스치며 올라간다. 평생 올라가기만 할 사람들처럼.
전동차가 온다. 내리기도 전에 밀고 들어가는 사람들은 이젠 찾아보기 어렵다. 많이 발전했다. 금방 내리지 않을 나는 되도록 안쪽으로 들어간다.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청년의 구둣발에 정강이가 부딪친다. 그는 쳐다보지도 않고 발끝만 살짝 구부리는 시늉을 한다. 다리를 풀어 내리지도 않고,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도 않는다. 왜 가만히 있는 남의 발끝에 부딪혀서 즐거운 폰질을 방해하느냐는 표정이다. 한때 ‘쩍벌남 아재’가 많았는데 이젠 별로 없다. 대신 다리 꼬고 앉아 있는 젊은이가 많다. 다리를 꼬지 않으면 무릎이 잘못되기라도 하는 걸까…. 저렇게 다리가 길어진 그들의 생체학적 다리 꼬기 필요성을 내가 느껴보지 않아서 모르는 걸까.
누군가 통화를 시작한다. 그나마 입 부분을 손바닥으로 가리며 최소한의 예의를 갖춘다. 잠시 후 또 다른 이가 통화를 한다. 너무 소리가 커서 뒤돌아보니 핸즈프리 상태로 말을 하고 있다. 자기네 회사 팀장님이란 사람과 통화하고 있는 이 청년은 자신의 업무 외엔 아무것도 상관없다는 듯이 큰 소리로 웃어가며 말하고 있다. 내려서 통화하라고, 참다못해 말해 보지만 내 눈길을 피하며 못 들은 척 통화를 계속한다. 통화를 끝낸 후 나에게 항의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내릴 역이 가까워졌다. 배낭들의 협곡을 헤치고 출입문 쪽으로 나간다. 문이 열렸는데도 내리지 않는, 문 앞에 붙어 서 있는 사람들을 피해 내린다. 차내에서 하던 게임을 계단에서까지 계속하느라 천천히 올라가는 사람들 뒤를 따라 올라간다. 화장실에 들렀더니 만원이다. 한 줄 서기를 해보려고 했으나 혼자 서 있는 나를 지나가 소변 보는 사람들 등 뒤로 각각 줄을 선다….
사실은 오늘의 동선 그대로다. 매일 겪고 있는 일이다. 이런 일이 나에게만 일어나는 일일까? 단지 지하철에서만 일어나는 것일까? 같은 수준으로 사회 전반에서 누구에게나 매일 발생하고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이 일본 관광을 갔다 와서 그들의 친절, 청결, 질서를 얘기하며 부러워한다. 그들은 유전자(DNA)에 질서가 장착된 채 태어난 걸까? 아니다. 그것은 교육되는 것이다. 일본은 지속적으로 교육하기 때문에 세계가 부러워하는 질서 국가가 됐고, 우리는 교육을 포기했기 때문에 무질서로 인한 피해를 우리 모두 보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지하철에서 위의 동선대로 움직인다고 가정해 보자. 지하철 내의 모든 이동 통로와 계단에 통행 방향이 표시돼 있다. 방향 표시가 여러 차례 반복된다는 것은 그 방향을 지키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고 이용객들에게 교육하는 것이다. 전동차를 타면 수시로 차내 방송이 나온다. 휴대전화는 무음이나 진동 모드로 설정해 두고 통화는 하지 말라는 내용이다. 목소리는 나긋나긋하지만, 내용은 엄격하다. 그 안내 방송이 반복적으로 자주 나오기 때문에 그 규칙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이 사회의 일원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교육하는 것이다.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말라는 말을 어려서부터 수도 없이 듣고 자란 그들이지만 사회에서 또다시 지속적인 교육을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라고 공중도덕을 지키라는 교육을 학교에서 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상식, 아니, 규칙이 실제로 지켜지고 있다는 것을 사회가 지속적으로 알려주어야 한다.
끊어진 대동강 철교를 서커스하듯 건너는, 바람 찬 흥남 부두를 떠나 거제도로 향하는 배 갑판에 빽빽이 올라탄, 우리 윗세대의 모습을 사진으로 보면서, 지하철에서의 그들 모습을 이해하려 애쓴다. 한 발이라도 앞서야 살아남을 수 있었던 그 절박함을 평생 몸에 지니고 살아왔을 그 세대들의 무질서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들의 자식들의 자식들인 지금의 청년들은 대체 왜 이러는가? 기죽어 살았던 베이비부머들이 기죽이지 않고 키웠던 그들의 아이들, 그들이 이제 기죽지 않는 청년들이 돼 있다. 차 뒷유리에 ‘아이가 타고 있습니다’ 대신 ‘까칠한 내 새끼 타고 있다’는 스티커를 당당하게 붙이고 다니는 것이 ‘기 살아 있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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