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배경 부산
비지스의 ‘홀리데이’ 흐르며
슬로모션으로 전개된 액션신
아이 웃음과 조폭 혈투 교차
유화같은 최고의 오프닝 장면
40계단 있는 부산 원도심 중구
6·25때 피란민들 판자촌 형성
구호물자 얻고 이산가족 상봉
60~70년대 삶의 애환 서린 곳
‘부산’은 영화의 도시다. 매년 가을이면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리고 한국의 많은 영화가 부산에서 촬영되기 때문이다. 부산에서 영화가 많이 촬영되는 이유는 부산에는 역사적 가치가 높고 현대와 과거가 공존하는 장소가 많기 때문이다. 전국 유일의 헌책방 밀집지역 보수동 책방골목과 용두산 공원, 피란민들이 즐겨 찾던 40계단 거리 그리고 국제시장까지 부산의 근대문화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더욱이 한국전쟁 이후 절절한 사연들까지 얽혀 있으니 부산은 그야말로 영화적 공간이 아닐 수 없다.
부산에서도 중구에 있는 도시철도 1호선 중앙역은 우리 삶의 애환이 가장 많이 녹아 있는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중앙역이 있는 터는 부산항과 근접해 있어 피란민들의 애환과 1960~1970년대 우리네 삶의 흔적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중앙역 11번 출구로 나오면 낯익은 계단이 눈에 들어온다. 이명세 감독의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오프닝 신에 등장했던 유명한 40계단이다. 완벽한 분장술로 경찰을 따돌리는 범인과 강력반 형사들 간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그린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는 1999년 안성기, 박중훈, 장동건, 최지우 등이 출연해 개봉 당시 큰 인기를 모았다. 서울 관객 700만 명을 동원했고 흥행 순위 4위를 기록했다. 개봉한 지 한참 지난 2007년에는 최고의 한국영화 1위로 뽑히기까지 했다. 영화는 소나기가 몰아치는 도심 한복판에서 잔인한 살인 사건이 일어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마약 거래를 둘러싼 조직의 암투가 개입했다는 단서를 잡은 서부경찰서 강력반에 비상이 걸리고 베테랑 우형사(박중훈)와 신참 김형사(장동건)가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투입된다. 범인(안성기)을 잡기 위해 애인(최지우)의 집을 무단으로 습격해 포위망을 좁혀간다. 변장술에 능한 범인과 우형사의 끈질긴 추격전이 펼쳐지고 마침내, 폐광에서 범인은 검거된다.
◇원도심의 명소,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촬영지 = 오프닝 신은 40계단에서 시작된다. 배경음악으로 비지스(Bee Gees)의 홀리데이(Holiday)가 잔잔하게 깔리면서 구름 낀 하늘,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잎들이 거리에 흩날린다. 그곳을 지나가는 연인들의 모습에서는 사랑이 충만하다. 조금 느린 템포의 슬로 영상은 마음의 안정과 위안을 준다. 천진난만한 얼굴의 아이가 40계단을 걸어 내려오고, 이내 클로즈업된 아이의 얼굴 위로 빗물이 한두 방울 떨어지더니 갑자기 장면이 전환된다. 도심 한복판에 거친 소나기가 내리치더니 검은 양복을 입은 폭력배들이 달려들어 계단에서 흉기를 휘두르며 혈투를 벌인다. 당시, 40계단에서 촬영된 센세이션한 오프닝 신은 최고의 명장면이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영상뿐만 아니라 사실감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위해 이 감독은 3개월 이상 인천서부경찰서 강력반 형사들과 동고동락하며 완성도 높은 시나리오를 완성해냈다. 영화는 당시 신출귀몰했던 용의자 신창원 사건과 맞물리면서 또 한 번 화제를 낳았다.
이 감독이 오프닝 장면에서 특히 비지스의 홀리데이를 고집한 일화도 소개됐다. 영화의 소재를 취재하는 과정에서 유전무죄라는 유행어를 만들어낸 지강헌 사건을 접한 뒤부터였다. 1980년대 후반 당시 지강헌은 감옥을 탈옥하고 시내에서 인질극을 벌이게 되는데 그는 형사에게 비지스의 홀리데이를 틀어줄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이 감독은 시나리오 작업 시, 비지스의 홀리데이를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썼기 때문에 영상과 음악의 절묘한 하모니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제작사 측에서는 원곡의 사용은 물론, 편곡 허락까지 받아내면서 엔딩 장면에서 편곡된 버전으로 배경음을 사용하기도 했다. 영화의 마지막 폐광촌에서 벌이는 격투 장면이었다. 이 엔딩 장면 역시 명장면으로 꼽히고 있으며, 이 장면은 워쇼스키 감독의 영화 ‘매트릭스’에서 오마주로 사용되기도 했다.
영화는 남성 중심의 액션 장르물이지만 살인사건이 중심이 돼 사건을 전개하는 데에만 그치지 않고 장면 장면마다 아름다운 화보집을 보는 듯한 비주얼을 선보인다. 이 감독은 시각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모든 요소들 그리고 음악까지 치밀한 계산과 구성으로 완벽한 화면을 추구하며 영화만이 표현해낼 수 있는 다양한 미장센을 녹여냈다. 신선한 영상미학을 선보인 이 작품은 이듬해 미국 선댄스 영화제 초청을 받아 출품됐다. 이 감독과 배우 박중훈은 선댄스에서 극찬을 받으며 할리우드로 진출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행운을 얻었다.
40계단은 1909~1912년 해안가와 동광동 언덕 주택지를 잇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영화 속에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 것과 달리, 실제 40계단의 분위기는 아담하고 소박했다. 그리고 20년 전의 모습과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좁은 골목에 늘어선 상가와 계단 중턱에 위치한 이발소는 그때 모습 그대로였다. 이곳에선 시간이 멈춰 있는 듯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계단 주변에 1950~1960년대 분위기를 재현하는 조형물과 전차모형이 세워진 것인데, 조형물들은 2004년부터 ‘40계단 테마문화거리 조성’의 일환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1980년대에 있었을 법한 예스러운 간판들이 눈길을 끈다. 때마침 1920년대를 재현하며 모던재즈페스티벌 행사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과거와 현재를 한꺼번에 만나는 느낌이었다.
◇애환의 역사를 품은 곳, 중앙동 40계단 = 올해는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촬영 20주년이 되는 해다. 지난 10월에 개막된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촬영 20주년을 기념해 40계단 거리에서 특별행사가 진행되기도 했다. 이 감독과 출연배우인 안성기가 참여했고 영화 상영회와 관객들과의 대화도 진행됐다. 영화의 뒷이야기를 들으며 추억의 장소에서 그때의 기억을 함께 나누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40계단은 영화 촬영지로도 의미가 있지만 또한 한국전쟁 시기에 피란민의 애환을 달래주는 공간이기도 했다. 40계단 주변에 피란민들이 몰려 판자촌을 이루게 되면서 피란민들의 생계를 위한 구호물자를 내다 파는 장터였으며 전쟁 중에 헤어진 가족들의 상봉 장소였다. 또한 지금은 건물들로 시야가 가려져 있지만 이곳은 당시 피란민들이 영도다리를 보면서 피란살이의 고달픔을 달래던 장소였다.
40계단이 만남의 장소가 된 이유는 산복도로로 가는 첫 계단이기 때문이다. 평지에서 언덕이 시작되는 초입에 40계단이 있었다. 산복도로란 산허리에 경사지를 개발하면서 생긴 도로를 말한다. 부산(釜山)은 해운대, 광안리, 송도 등이 유명해 얼핏 바다를 떠올리지만, 지명에서 보듯 산(山)이 많은 지역이다. 평지가 좁고 산이 많아 살 곳이 마땅치 않은 곳이다. 일제강점기에 일자리를 찾아 전국에서 온 사람들과 한국전쟁 때 피란민들은 산으로 모여들면서 자연스럽게 산복(山腹)도로가 형성됐고 40계단도 생겼다. 한국 전쟁 이후 영주동 뒷산, 동광동, 보수동 일대에는 10만 명이 넘는 피란민들이 살았다.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역시 거의 부산에서 촬영했다. 오프닝 신은 물론, 범인 장성범의 애인이 살고 있는 집과 추격전 신은 중앙동 일대에서 촬영했다.
2000년 연쇄방화범과 소방대원들의 사투를 그린 양윤호 감독의 ‘리베라 메’는 영화의 대부분을 초량에 있는 침례병원과 국제시장 일대에서 촬영했다. 곽경택 감독의 ‘친구’는 자갈치시장과 영주동 일대가 주된 촬영지였고 영화의 흥행과 함께 부산이 전국적인 관심을 받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천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윤제균 감독의 ‘해운대’와 ‘국제시장’,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 윤종빈 감독의 ‘범죄와의 전쟁’ 등 한국을 대표하는 영화들이 부산 중구에서 촬영됐다. 2018년 개봉한 할리우드 영화 ‘퍼시픽 림2’와 ‘블랙 팬서’도 부산 일대에서 촬영해 화제가 됐다.
부산에서 만들어진 영화들을 생각하며 40계단을 올라가니 새로운 길이 시작된다. 층층이 언덕 꼭대기까지 길이 이어진다. 정면을 가로막는 40계단의 독특한 생김이 영화인들에게 얼마나 매력적으로 비쳐졌을까. 40계단은 마치 한 단계씩 도약하는 우리 영화의 미래를 보여주는 듯하다.
글·사진 = 양경미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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