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문호가 개방되면서 들어오기 시작한 맥주는 처음에는 수요층이 많지 않아 소량 수입됐다. 그러던 것이 1910년에 조선을 병탄한 이후 일본은 열도에서 생산된 맥주를 수입하기 시작해 고급 술집에 주로 판매하며 시장을 넓혀갔다. 조선에서 맥주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조선까지의 운송비와 세금이 포함된 가격으로 판매됐는데 조선에서 맥주를 생산하기 시작하면서 이러한 비용도 줄어들어 상대적으로 비싼 일본 맥주는 찾는 사람이 적어 수입량이 점차 줄어들게 된다.

1931년 9월 18일에 일본이 자작한 철도 폭파사건인 류타오후(柳條湖) 사건이 발생하는데 이 일을 계기로 만주에서 중국과 일본의 전투가 벌어진다. 전면적인 만주 침략을 통해 일본은 만주를 점령하고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부의를 전면에 내세워 만주국을 세우게 된다.

만주에 주둔하던 관동군은 본격적으로 중국 본토에 대한 침략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전쟁에 필요한 군수물자가 원활하게 지원될 수 있도록 보급체계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만주사변으로 인해 대륙으로 전선이 확대된 일본은 새로운 상황에 맞게 조선을 열도에서 생산된 물품의 소비처로만 생각하지 않고 보급품을 생산하는 군수기지로 활용하기 위해 1933년 영등포와 당산 일대에 많은 공장을 짓게 된다.

이때 지어진 많은 생산시설 공장 중에 맥주 공장도 포함됐다. 당시에 만들어진 맥주회사가 다이닛폰맥주회사에서 8월에 설립한 조선맥주와 기린맥주에서 12월에 설립한 쇼와기린맥주주식회사다. 이 두 회사를 시작으로 우리나라 맥주 생산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공장만 있지 원료를 구할 수 없었던 초기에는 일본에서 맥아와 홉 같은 원료를 수입해 맥주를 만들었다. 나중에는 함경도에서 1934년부터 재배하기 시작한 홉을 포함해 점차 조선에서 재배된 재료로 맥주를 생산했다.

당시에는 기계화도 돼 있지 않아 모든 공정이 수작업이었다. 당시 직원들은 맥아즙을 만들 때도 손수 작업했고 맥아즙을 발효 통에 넣은 후 효모를 담은 대야를 지게로 옮겨와서 발효 통에 넣어 맥주를 생산했다. 그렇게 수고와 땀으로 생산된 맥주였던 것이다. 판매할 때에도 지금과 같은 플라스틱 박스가 없던 시절이라 나무 상자에 맥주병을 담아 유통했는데 평탄하지 않은 도로 사정과 운반 여건으로 병끼리 부딪쳐서 깨지는 경우가 발생했다. 이것을 방지하고자 병들 사이에 볏짚을 넣어 부딪치지 않도록 했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유통과정에서 깨지거나 냉장시설 부재로 변질되는 등 품질관리도 쉽지 않았다. 워낙 가격이 높다 보니 친일파여서 지위가 높거나 돈 있는 사람이 아니면 마시기 힘든 술이었다. 많은 물을 사용하는 맥주 공정의 특성 때문에 한강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고 하지만 그 당시 군수품으로 취급돼 다른 공장들과 같이 지어지다 보니 영등포에 들어섰을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준비가 잘 진행됐기 때문이었을까? 만주에 있던 관동군은 결국 1937년 중국과의 한판 승부를 벌이게 되는데 이게 바로 중일전쟁이다. 이후에 일본이 패망하면서 1947년 2월에 쇼와기린맥주주식회사는 동양맥주로 사명이 바뀌었다. 이게 OB맥주인데 나중에 두산그룹이 벨기에 인베브사에 매각하면서 국적이 또 바뀌게 된다. 미군 관리하에 있던 조선맥주도 1952년에 민간에 불하됐다. 크라운맥주로 브랜드를 이어가다가 지금은 하이트맥주로 사명과 브랜드명을 같이 사용한다.

술칼럼니스트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