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회평 논설위원

국내에 슈퍼컴퓨터가 처음 도입된 건 서울올림픽이 열렸던 1988년이다.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이 2400만 달러(약 270억 원)에 도입한 1호기는 2t 넘는 무게에도 메모리 1GB, 디스크 용량 60GB에 불과했다. 요즘 PC 성능보다 떨어지는 소박한 사양이었다. 그래도 과학적인 기상예보의 출발점이 됐다. 30년이 지나 슈퍼컴퓨터 5호기 ‘누리온’이 다음 달 3일 본격 가동된다. 몸값은 587억 원으로 1호기와 큰 차이는 없지만, 놀랄 만큼 더 커지고 빨라졌다. 무게가 133t, 실측 성능은 13.92페타플롭스(PF)다. 1PF는 초당 1000조 번의 연산이 가능한 성능이다. 열을 식히는 데만 하루 1238만ℓ의 물이 사용된다.

슈퍼컴퓨터는 국가 과학기술력을 상징한다. 시뮬레이션을 통해 연구 정확성을 높이고, 시간·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인다. 기초과학은 물론, 자동차·바이오·기후변화 등 활용 분야가 무한하다. 데이터가 중시되는 4차 산업혁명기엔 가치가 훨씬 커진다.

슈퍼컴퓨터란 이름에 걸맞은 평판을 얻으려면 매년 6월, 11월 두 차례 발표되는 ‘슈퍼컴퓨터 톱 500’에 들어야 한다. 지난주 나온 순위에선 미국 오크리지 국립연구소가 운영하는 ‘서밋’이 처리 속도 143.5PF로 1위였다. 5년간 10번 선두를 차지한 중국을 지난 6월 제치더니 거푸 1위다. 그러나 중국은 500위권 점유율에서 45.8%로 21.6%인 미국을 압도했다. 미·중(美中) 간 자존심 대결이 볼 만하다. 미국은 서밋보다 성능이 10배 뛰어난 엑사플롭스(EF)급 컴퓨터를 3년 안에 내놓을 계획이고, 중국은 모든 부품을 국산화한 차세대 슈퍼컴을 시험 가동 중이다. 두 강국 뒤를 유럽 연합군과 일본이 뒤쫓는 형세다. 한국은 13위 누리온을 비롯해 6곳이 들어갔다.

슈퍼컴은 미래 과학기술 패권 경쟁의 서전이다. 컴퓨터 혁명을 이끌어온 트랜지스터의 소형화·집적화는 이제 한계에 직면했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이 양자컴퓨터다. 슈퍼컴퓨터가 150년에 걸쳐 계산할 것을 단 4분에 끝낼 수 있다니 입이 떡 벌어진다. 다만, 상용화까지는 한참 먼 길을 가야 한다. 최근 미국 IBM·구글이 초기 단계 제품을 공개했고, 중국은 국가 주도로 양자연구소 개설을 앞두고 있다. 지금 미·중 간 무역전쟁이 현재 패권을 다투는 것이라면, 슈퍼컴·양자컴 경쟁은 미래 패권을 가름할 게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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