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징용배상 판결과 치유재단 해산
‘식민지배 미봉’ 패러다임 끝장
새로운 틀 없이 卽應외교 급급
訪日 한국인 급증해 年 714만
과거사 문제와 곳곳에서 괴리
미래 내다보며 선택지 넓혀야
지난 10월 30일 대법원은 강제징용 피해자들에 대해 일본 기업이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강제징용 배상은 역대 우리 정부가 청구권협정으로 해결됐다는 입장을 유지해 온 만큼 문재인 정부는 난제를 안게 됐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5년에도 ‘한일회담 문서공개 민관합동위원회’는 위안부 피해자, 사할린 동포, 원폭 피해자 외의 문제들은 1965년 청구권협정으로 해결된 것으로 결론을 내렸었다. 21일 한·일 화해치유재단 해산 결정까지 발표돼 악재가 또 하나 늘었다.
한·일 간 과거사 문제의 근원은, 일본 식민지배가 불법이라는 우리의 입장을 관철하지 못한 채 한·일 국교 정상화가 이뤄진 데 있다. 우리 정부는 한·일 협상이 시작된 1951년부터 ‘한일병탄늑약’이 원천적으로 불법 무효라는 입장을 견지하면서 끈질기게 싸웠으나, 결국 협정문을 각자 다르게 해석하는 절충을 통해 협상을 종결시킬 수밖에 없었다. 대신 힘들게 얻어낸 5억 달러의 경협자금은 경부고속도로, 포항제철 등 ‘한강의 기적’을 이뤄낸 종잣돈으로 소중하게 쓰였다.
이승만 정부는 광복 후 몇 년 되지 않았기 때문에 ‘한·일 관계를 얼마 동안 절연 상태에 두고 일본 잔재를 청산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었다. 박정희 정부는 ‘아무리 어제의 원수라 하더라도 우리의 오늘과 내일을 위해 필요하다면 그들과도 손을 잡아야 하는 것이 국리민복을 도모하는 현명한 대처’라고 보고 한·일 국교 정상화를 추진했다. 김대중 정부는 ‘이제 한·일 두 나라는 과거를 직시하면서 미래 지향적인 관계를 만들어 나가야 할 때’라고 인식하고 ‘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을 선언했다.
그런데 지난 세월 유용했던 대일 외교 패러다임은 이미 유효기간이 끝났고, 이를 대체할 새로운 틀이 없다 보니 오늘날의 대일 외교는 즉응(卽應) 외교, 부정(否定)의 패러다임이 돼 버렸다. 일본을 규탄하고 우리끼리도 비난하며 과거와 미래 간 균형이 무너진 것이다. 2012년 한국을 찾은 일본인이 350만 명, 일본을 찾은 한국인이 200만 명이었다. 그런데 2017년 ‘231만 명 대 714만 명’으로 역전된 것은 길을 잃은 대일 외교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과거사에 관한 일본의 잘못된 언행은 앞으로도 준엄하게 꾸짖어야 한다. 그렇지만 과거사 문제가 대일 외교의 전부인 듯한 상황이 계속되고 큰 그림이 보이지 않는 것은 국익 관점에서 바람직하지 않다. 특유한 결집력을 보이는 일본과 상대하기 위해서라도 대일 외교의 큰 전략을 세워야 한다. 미래 지향적 관계 발전이라는 구호만으로는 부족하다. 경제·안보 등 대일 관계의 모든 측면을 팩트에 입각해서 면밀하게 분석하고 우리의 전략적 목표와 추진 방안을 만들어 정권교체와 관계없이 일관되게 밀고 나가야 한다. 한·일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개방적 통상 체제와 열린 바다를 추구한다.
우리의 3대 교역국이자 핵심 부품 공급국인 일본과의 무역은 수치 이상의 중요성을 갖는다. 보호무역주의 반대와 같은 이슈에서 한·일 양국의 이해는 일치한다. 또,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 증대로 한·일이 공유하는 안보 이익이 커지고 있다.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이 체결되고 올해 한·일 안보정책협의회가 3년 만에 열린 이유다. 나아가 장래 미국의 역할 감소와 같이 동북아의 안보 지형이 크게 변화할 경우에 대비해 우리의 선택지를 늘려 두어야 한다.
경제든 안보든 외통수에 몰리면 안 된다. 일본인의 한국 방문을 늘리는 것도 중요한 아이템이다. 한국을 일본 중고등학교의 수학여행지로 복원시키기만 해도 감소 추세를 반전시킬 수 있다. 한국 젊은이들의 일본 취업은 시장에 맡겨진 문제이긴 하지만, 일본의 심각한 일손 부족을 고려하면 정부가 역할을 할 공간도 있을 것이다. 아울러 한·일 간 대화의 장도 만들어야 한다. 현 상황에서는 정부 간 협의에서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없으니 민간 대화에 정부 관리가 참여하는, 무게 있는 트랙 1.5 대화를 출범시키는 것을 고려할 수 있다. 논의 결과는 양국 정상에게 직보하고, 보고 내용도 공개와 비공개로 나누어 심도를 높일 수 있다.
올해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 전 일본 총리가 ‘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을 선언한 지 2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다. 아무리 한·일 관계가 어렵다지만, 미래를 위해 한 걸음이라도 내디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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