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켈란젤로, ‘최후의 심판’, 프레스코, 17×13m, 1535-1541년. 로마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 자세히 살펴보면 살가죽에 그려진 미켈란젤로의 자화상(작은 사진)을 발견할 수 있다.
미켈란젤로, ‘최후의 심판’, 프레스코, 17×13m, 1535-1541년. 로마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 자세히 살펴보면 살가죽에 그려진 미켈란젤로의 자화상(작은 사진)을 발견할 수 있다.

■ 전준엽이 만난 美感의 세계 - ④ 자화상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
벗겨진 가죽으로 묘사된 작가
삶에 대한 종교적 죄의식 담아

젠틸레스키 ‘홀로페르네스…’
성폭력 당한 과거에 대한 복수

코코슈카는 ‘바람의 신부’서
실연당한 아픔 그림으로 표현

사건·신화의 한장면속 자화상
자신 찾아가는 존재론적 여행


젠틸레스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 캔버스에 유채, 199×163㎝, 1620년.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젠틸레스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 캔버스에 유채, 199×163㎝, 1620년.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예술가에게 작품은 자신을 비추는 거울과도 같은 것이다. 그중에서도 자신의 삶을 압축해 보여주는 자화상은 작가의 본질에 한 발짝 더 다가가는 열쇠 같은 그림이다. 미술사에 이름을 올린 많은 작가가 자화상을 남겼다. 얼굴을 중심으로 하는 자화상 포즈로 그린 게 대부분이지만,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인생 갈피에서 사건으로 솟아오른 자화상이 있는가 하면, 대표작 속에 숨긴 자화상도 있다. 신화 인물로 변장해 자신의 모습을 그리거나 자서전처럼 일대기 자체를 자화상으로 장식한 작가도 보인다. 여러 유형으로 자화상을 그렸지만 그 저변에 흐르는 것은 ‘나는 누구인가’ 하는 근본적인 물음이다. 결국 자화상은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이고 자기와 끊임없이 맞서는 인생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미술사상 가장 특이한 자화상을 남긴 이는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1475∼1564)다. 그는 대작 ‘최후의 심판’ 속에다 천 조각처럼 늘어진 살가죽 자화상을 그렸다.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인 ‘천지창조’와 함께 미켈란젤로 회화의 정점을 보여주는 ‘최후의 심판’은 인류의 위대한 회화 유산으로 손꼽힌다. 시스티나 성당 제단에 프레스코 기법으로 제작한 이 벽화는 크기(17×13m)와 내용 면에서 보는 이를 압도한다. ‘성서’의 종말론과 단테의 ‘신곡’을 모티브로 미켈란젤로의 천재적 상상력이 빚어낸 이 대작은 6년에 걸쳐 완성됐다. 세상 끝나는 날 예수가 인류를 심판해 천국과 지옥으로 보낸다는 내용이다. 가운데 위치한 주인공인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천국이 묘사돼 있는데, 천사와 열두 제자, 순교 성인들이 등장한다.

아랫부분은 지옥이다. 무채색에 가까운 어두운 분위기로 조성돼 설명 없이도 지옥임을 짐작하게 한다. 단테의 ‘신곡-지옥 편’을 참고한 구성인데, 죄 지은 인간들을 지옥으로 실어 나르는 뱃사공 카론의 모습이 두드러진다.

코코슈카, ‘바람의 신부’, 캔버스에 유채, 221×181㎝, 1914년. 바젤 현대미술관
코코슈카, ‘바람의 신부’, 캔버스에 유채, 221×181㎝, 1914년. 바젤 현대미술관
천국과 지옥 사이의 중간계도 나타나 있다. 연옥이다. 죽은 후 영혼이 심판받기 위해 대기하는 곳이다. 여기서 죄의 정도에 따라 천국과 지옥행으로 갈린다.

그러면 미켈란젤로의 살가죽 자화상은 어디에 있을까. 그림 윗부분의 심판자 그리스도 아래쪽에 수염이 덥수룩한 사람이 왼손에 들고 있는 흉측한 몰골이 보인다. 미켈란젤로의 얼굴을 닮았다. 미켈란젤로의 살가죽을 들고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산 채로 살가죽이 벗겨지는 형벌로 순교했다는 성인 바르톨로메오다. 오른손에 살가죽을 발라내는 데 사용한 단검까지 들고 있다. 선명한 모습으로 그려진 사람은 바르톨로메오의 영혼이며, 들고 있는 살가죽은 자신의 육신을 상징하는 이미지다. 미켈란젤로는 성자의 껍질에다 자신의 얼굴을 그려 넣은 셈이다.

왜 이처럼 끔찍한 몰골의 자화상을 그렸을까.

‘최후의 심판’을 그리던 시기는 미켈란젤로가 육십 줄로 들어서던 무렵이다. 교황의 총애를 받으며 20대부터 이탈리아 최고의 조각가·건축가·화가로 우뚝 섰지만, 젊은 시절부터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고 인생의 혹독함도 일찍부터 알았다. 재능으로 돈과 명성을 얻었지만 죄에 대한 두려움도 컸다. 하나님이 특별히 준 재능을 인간적 욕심을 채우는 데 낭비했다는 생각 때문에 그리스도 앞에 서는 날 자신은 어떤 심판을 받을 것인가 하는 데 대한 공포가 있었다. 예술가로 대접받으며 살았지만, 신의 영광을 증명하는 진정한 임무를 다하지 못한 삶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은 성자의 껍질 같은 존재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최후의 심판’은 완성 후 유럽 전역에서 화제가 됐다. 예수의 대표적인 이미지(성스러운 분위기, 수염 등)가 없을뿐더러 천사나 성인들을 모두 누드로 그려서 성당에 어울리지 않고, 성자 뒤에 후광이 없고 천사에게도 날개가 없어서 성스러운 분위기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런 평가 때문에 천박하고 음탕하다는 부정적 여론이 들끓었다.

미켈란젤로는 육체의 순수한 아름다움과 인간이 만들어 낸 무수한 관념을 제거하고 신이 창조한 원래의 모습에 가깝게 표현하기 위해 누드로 그렸지만, 사람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런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교황은 미켈란젤로에게 부분 개작을 지시했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교황께서 먼저 세상을 바로잡으시면, 그림 개작을 하겠다’며 거부 의사를 분명히 했다.

‘최후의 만찬’은 공개 18년이 지난 뒤 교황의 명에 따라 개작의 수모를 겪게 된다. 인물의 중요 부위를 모두 천으로 가려 버렸는데, 이 작업은 미켈란젤로의 제자 볼테라가 맡았다. 그로 인해 볼테라는 ‘바지 만드는 사람’이라는 우스꽝스러운 별명을 얻었다.

인간의 정신적 자유를 생명으로 삼는 예술계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여성 차별은 심하다. 여성은 생명을 잉태하고 창조하는 능력 때문에 예술 창조에 있어 남성보다 열등할 수밖에 없다는 이상한 논리를 내세워 여성의 예술 창조 능력을 과소평가해온 것이다.

이런 고정관념을 통쾌하게 깨뜨려버리는 그림을 보자. 400여 년 전 여성 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1593∼1656)가 그린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는 예술의 힘이 얼마나 강렬한지를 잘 보여준다. 카라바조, 루벤스와 더불어 바로크 미술을 이끌었던 젠틸레스키는 서양미술사에 여성 혁명을 일으킨 위대한 인물이다. 서양미술사에 최초로 등재된 여성 화가로, 화가였던 아버지로부터 그림을 배운 그녀는 타고난 천재였다. 열여덟 살 때 아버지의 친구이자 스승인 타시에게 강간을 당했고, 오랜 법정 투쟁으로 미흡하게나마 보상을 받았지만, 정신적 상처는 치유되지 않았다.

결국 아픈 개인사가 이 작품을 낳은 셈이 됐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용감한 여성 유디트의 이야기를 그린 것인데, 젠틸레스키는 이 주제로 세 점을 그렸다. 그중 두 번째 버전이 대표작이 됐다. 유디트가 고향 베툴리아를 점령한 아시리아 장군 홀로페르네스에게 술을 먹여 잠들게 한 다음 목을 베고, 그의 목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온다는 내용이다.

유디트 이야기는 서양예술의 인기 주제 중 하나다. 그래서 많은 예술가가 그림, 음악, 문학, 무용 등을 통해 저마다의 유디트를 창조해냈다. 회화에서는 티치아노, 보티첼리, 조르조네, 크라나흐, 카라바조, 클림트 등의 작품이 유명하다. 이들이 창조한 유디트는 귀족 부인이거나 청순한 소녀 또는 요부의 이미지를 하고 있다.

이에 비해 젠틸레스키의 유디트는 근육질의 전사 모습이다. 여기서 유디트는 홀로페르네스를 힘으로 완전히 제압하고 있다. 단호하고도 굳센 의지가 보이는 표정으로 당당하게 목을 베는 중이다. 홀로페르네스는 소리 한번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겁에 질려 죽어가는 얼굴이다. 이 그림에서 유디트는 적장을 유혹할 만큼 미인이 아니다. 강렬한 힘이 느껴지는 여전사 모습이다. 누굴 그린 것일까.

바로 젠틸레스키 자신이다. 그녀가 남긴 순수한 의미의 자화상과 비교해 보면 이 그림의 유디트가 그녀 자신이라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다. 자신을 전사의 모습으로 표현한 자화상인 것이다. 그리고 홀로페르네스는 자신을 성폭행한 타시의 얼굴로 그려냈다. 이 그림이 발표되자 피렌체 시민들은 경악했다. 당시 젠틸레스키와 타시는 성폭행 사건 재판의 당사자로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렸기 때문이다. 젠틸레스키를 옹호한 동료 화가들은 ‘타시를 제대로 징벌하는 통쾌한 그림’으로 평했다. 젠틸레스키는 이 그림을 통해 자신의 심정을 고백하고 있다. 타시라는 구체적 인물을 내세웠지만, 그녀가 정말로 징벌하고 싶었던 것은 남성 중심의 사회 질서였다.

지독한 사랑은 열병을 앓는다. 사랑에 중독된 예술가에게 열병의 후유증은 종종 위대한 작품으로 남는다.

표현주의 화가 오스카 코코슈카(1886∼1980)의 초기 대표작 ‘바람의 신부’도 그렇다. 이 작품은 젊은 예술가의 격정적인 사랑과 실연의 결실로 태어났다. 문제의 여인은 19세기 말 유럽 예술계에서 뮤즈로 명성이 자자했던 알마 말러 베르텔이다.

전준엽 화가·미술저술가
전준엽 화가·미술저술가
구스타프 클림트가 예술세계를 완성하는 데 영감의 원천이 된 것으로 유명한 알마는 대작곡가 구스타프 말러와 정식으로 결혼해 알마 말러로 알려졌다. 말러가 죽은 후 작곡가 알렉산더 폰 쳄린스키, 바우하우스 운동의 핵심인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 등 당대의 많은 예술가와 염문을 뿌렸다. 예술적 토양에서 자란 알마는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예술적 재능을 보였지만, 예술가로는 성공하지 못하고 예술가의 ‘연인’으로 이름을 남긴 셈이 됐다.

코코슈카가 알마를 만난 것은 1914년이다. 미망인이었던 알마가 7년 연상이었다. 스물여덟의 청년 코코슈카에게는 순정이었지만, 알마에게는 여름날 더위를 식혀주는 바람 같은 사랑이었다. 그들의 온전치 못한 사랑은 1년 만에 끝난다. 알마가 일방적으로 마음을 접은 것이었다. 그러나 코코슈카의 가슴에 가득 지펴진 사랑의 불길은 꺼지지 않았다. 그는 실물 크기의 알마 인형을 만들어 7년이나 지니고 있었다. 젊은 예술가의 지독한 사랑의 불길을 잡는 데 7년의 세월이 걸린 것이다. 이런 사랑의 집착은 위대한 작품으로 흔적을 남겼다. 이 작품은 코코슈카의 젊은 날 초상이다. 전통 방식의 자화상은 아니지만 자신의 심정을 표현주의적 방식으로 그려낸 심리적 자화상이다.

격정적 사랑을 검푸른 색채와 강렬한 터치에 담았다. 작가의 고통이 역력하게 보인다. 알마와의 사랑이 무척 힘들었던 당시의 심정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주체할 수 없는 열정과 사랑의 파국을 예견하는 직관이 얽혀 있다. 옆에 잠든 알마는 평온하다. 스쳐가는 사랑의 유희에 만족한 듯. 코코슈카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은 죽을 것 같은 열정이지만, 알마에게는 한여름밤 꿈 같은 사랑이라는 것을.

당시 남녀의 사랑을 이처럼 포옹 구성으로 담은 그림이 유행이었다. 특히 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이런 형식에 담은 작품 중 유명한 것이 몇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클림트의 걸작 ‘키스’다. 여기서 남자는 클림트고 여자는 알마라는 해석이 유력하다. 에곤 실레도 이 작품에 영향을 받아 포옹 주제에 자신의 여인들을 담았다. ‘죽음과 소녀’라는 작품에서는 자신과 애인을, ‘포옹’에서는 부인을 그렸다.(문화일보 10월 30일자 28면 3 회 참조)

전준엽 화가·미술저술가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