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한 고려대 국제대학원장 前 외교부 차관

비핵화 종착역을 향해 달리던 열차가 속도를 늦추더니 급기야 멈춰버린 형국이다. 미국 중간선거 직후인 지난 8일로 예정됐던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과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 간 미·북 고위급회담이 연기되더니 27일쯤 개최될 것으로 기대됐던 미·북 고위급회담도 결국 북측의 묵묵부답으로 불발됐다. 이에 따라 내년 초에 열릴 것으로 기대를 모았던 2차 미·북 정상회담도 미뤄질 수밖에 없게 됐다. 12월 12일이면 미·북 정상회담이 개최된 지 6개월인데 비핵화 협상이 교착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비핵화 열차가 선로 위에 멈춰버리게 된 것은 미국과 북한의 입장이 선명하게 드러나 첨예하게 부딪치게 된 게 원인이다. 북한은 미국이 ‘상응 조치’를 하면 영변 핵시설을 폐쇄하겠다고 하고, 한동안 종전선언을 요구하다가 먹히지 않자 경제 제재 완화를 요구한다. 그러나 미국은 북한의 실질적 비핵화 조치, 즉 핵 프로그램을 제대로 ‘신고’하기 전에는 대북 제재를 완화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최근 마이크 펜스 미 부통령은 “2차 미·북 정상회담 전에 북한에 대해 핵 프로그램 ‘신고’를 요구하진 않겠으나, 2차 정상회담에서 향후 어떤 식으로 비핵화할지에 대해 합의를 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북한이 당장은 신고를 안 해도 되지만, 2차 정상회담에 신고를 포함한 비핵화 로드맵을 가지고 나오라는 얘기다. 로드맵 준비가 안 되면 2차 정상회담이 계속 지연될 것이란 의미다. 북한이 미국과의 실무회담은 물론 고위급회담에 나서지 않는 것은 이러한 미국의 입장을 꺾을 수 있는 준비가 안 됐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러한 가운데 미국은 대북 압박의 고삐를 더욱 죄는 양상이다. 27일 법무부는 유류·석탄 거래 등을 통해 북한 금융기관 돈세탁을 도운 싱가포르 기업 1곳, 중국 기업 2곳의 자금을 몰수해 달라는 소송을 연방법원에 제기했다. 미 법무부가 대북 제재 위반 기업에 대해 자산 몰수 소송을 제기한 것은 지난해 8월 이후 처음이다. 이 밖에도 27일 자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선박 40척과 화물선 수십 척이 200건에 이르는 유류·석탄 불법 환적 혐의를 받고 있다. 앞으로 자금 몰수 대상 기업이 늘어날 수 있다는 얘기다. 이에 앞서 23일 뉴욕타임스(NYT)는 일본의 최대 은행 미쓰비시 UFJ 파이낸셜 그룹(MUFG)이 북한의 자금세탁에 관여해 대북 제재를 위반한 혐의로 미국 검찰의 수사를 받고 있다고 보도했다. 적대국은 물론이고 동맹이나 우방의 기업까지도 대북 제재를 위반하면 엄청난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점이 명확해지고 있다.

상황이 이러할진대 우리 정부는 남북 철도연결 공동조사 활동이 23일 유엔 안보리로부터 제재 예외로 인정받게 됐다고 좋아하고 있고, 남북 협력이 북한 비핵화에 도움이 된다는 비현실적인 전제에 입각해 대북정책을 펴고 있다. 북한의 유류·석탄 불법 환적을 미국·일본·호주 등이 항공 정찰을 통해 감시하고 있는데, 우리 정부는 남북 군사합의를 통해 군사분계선(MDL)으로부터 비행금지구역을 20∼40㎞ 확대해 최전방 북한군 동향을 살피는 정찰활동을 스스로 포기했다.

비핵화와 남북 협력을 함께 이루려면, 우리 정부는 북한에 먼저 실질적 비핵화 조치를 설득해야 한다. 어설픈 비핵화는 남북 경협으로 이어질 수 없다는 확신을 북한에 심어줘야 한다. 그리하여 북한 스스로 실질적 비핵화 조치를 통해 시장의 불확실성을 제거할 때 우리 기업들은 주저 없이 북한으로 달려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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