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좋아 보이는 것들의 배신 / 캐스린 H 앤서니 지음, 이재경 옮김 / 반니
우리 주변의 일상적인 공간들
‘당대의 이데올로기’ 반영하며
사람들의 의식까지 규정시켜
치마 속 훤히 보이는 유리계단
절대 늘지않는 여성 화장실 등
구체적 사례 통해 실체 까발려
“끝없이 이의 제기·시정 요구”
어쩌면 현실을 재구성하는 드라마, 영화, 상업 광고, 문학작품과 대중가요 등에 드러난 권력과 정치를 분석·비판하는 데 전력을 소진하다 보니 일상적인 공간, 일상적인 디자인은 2선으로 밀린 듯도 하다. 거기까지 관심을 가지기 어려운, 말하자면 여력이 없는 상태다. 공공 여성 화장실이 부족하고 튼튼한 20대 남성 청년을 모델로 한 지하철 무인 개찰구 디자인이 불편하고, 때론 표준사이즈 밖에 없는 옷 때문에 화가 나지만 열불 내며 목소리를 높이기엔 상대적으로 작은 문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2010년 미국 의회에서 시민 대표로 여성 화장실 문제를 제기한 캐스린 앤서니 일리노이대 건축대 교수는 공간과 디자인 문제란 그렇게 쉽게 넘길 일이 아니라고 밝힌다. 공간과 디자인이야말로 당대의 이데올로기를 반영하고 이것은 다시 우리의 의식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매일 매일, 아주 일상적으로. 우리가 인지하든 그렇지 않든 패션, 제품, 건물 디자인은 우리의 삶과 의식을 놀랍고 강력한 방식으로 빚고 결정하며, 우리가 느끼고, 생각하고, 행하는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또 이런 편향들은 단순히 쓰기 불편한 정도를 넘어 심리, 사회, 문화, 세대 간의 간극을 넓히고 특정 젠더와 연령, 체형에 대한 편견을 공고히 한다. 그러니 더 이상 젠더, 연령, 체형 편향을 통해 소비자 중 특정 집단에만 호의를 베풀고 불공평한 권한을 부여하는 디자인을 참지 말아야 한다고, 우리 모두 부단히 의문과 이의를 제기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제 행동을 개시할 시간”이다.
하루 4000명 이상이 관람하는 그리스 아테네의 명소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을 보자. 이곳 건축의 특징은 투명이다. 관람객들은 투명 계단을 오르고 바닥이 유리로 된 갤러리들을 거닐며 발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고고학 유적과 유물에 감탄하곤 한다. 이는 4000평에 달하는 전시 공간을 자연광으로 채우겠다는 건축가의 콘셉트를 반영한 것이다. 이 콘셉트는 비평가와 관람객 모두에게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이 유리 바닥 갤러리와 계단은 디자이너가 미처 생각지 못한 문제를 만들었다. 바로 이곳이 여자들의 치마 속을 엿보는 데 최적의 장소로 떠오른 것이다.
오하이오주 콜럼버스시에 있는 1억 달러짜리 법원 건물의 유리 계단도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다. 법복 안에 거의 매일 원피스를 입는 줄리 린치 판사는 이렇게 분노했다. “신축 건물을 개장하면서 이용자 절반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이렇게까지 무시할 수 있다니 놀라워요.” 세상의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을 전혀 배려하지 않은 디자인인 것이다.
2010년 의회에서 화장실 문제를 제기한 당사자답게 공공시설의 화장실 문제도 지적한다. 전 세계 어디나 여성 화장실 앞엔 긴 줄이 늘어서 있는데, 왜 공공건물에서 여성 화장실의 숫자는 남성 화장실 숫자에 비해 늘어나지 않느냐는 것이다. 왜 남성 화장실에는 기저귀 갈 곳이 없는지, 왜 가족 화장실은 고급 럭셔리 빌딩에만 있는지도 함께 생각해 보자고 제안한다.
이어 저자의 날카로운 시선은 사회적으로 규정한 ‘평균인’ 이외의 많은 이를 배제한 모든 공간 구성과 디자인의 문제를 도마 위에 올린다. 맨몸으로 날래게 움직이는 남자들을 위주로 디자인돼 가방을 든 여성이나 아이를 안은 부모, 몸이 불편한 노인들은 이용하기 어려운 자동발권기나 셀프 개찰구, 키 작은 여성들은 잡을 수 없는 지하철 손잡이, 남성들의 표준 키에 맞춘 연단, 왼손잡이를 무시한 대학의 각종 설비들, 평균치 몸매만을 대상으로 한 패션, 노인들에겐 매우 위험한 유행에 맞춘 높고 거대한 침대 매트리스, 평균 남성 체형에 맞춰 디자인된 자동차….
사용 주체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이 같은 디자인은 불편함을 넘어 안전사고로 이어진다. 당연히 단골 피해자는 평균이 아닌 사람들, 평균보다 키가 작거나 뚱뚱한 성인, 여성, 어린이나 노약자, 장애가 있는 사람들일 수밖에 없다. 세상은 이들을 위해 설계되지 않았다. 이들은 이러한 세상에서 하루하루 더 많은 불편과 위험을 감수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저자는 비판적인 소비자가 될 것을 주문한다. “우리는 모두 보통 체격과 대학생 나이의 신체 건강한 (백인) 남자가 아니다”는 것이다. 권력이 반영된 표준을 당연시하지 말고,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라고 한다. 소비자 사이트를 수시로 방문하고 문제가 있는 제품에 대해서는 제작업체에 압력을 넣으라고 한다. 관할 행정기관에 보다 나은 공공 디자인의 중요성을 알리고, 요구하라고 한다.
그는 프랑스 사회학자이자 철학자 앙리 르페브르의 말을 인용한다. “삶을 바꾸라. 사회를 바꾸라. 적절한 공간을 창조하지 않고서는 이 모든 생각이 완전히 의미를 잃고 만다.… 새로운 사회적 관계가 새로운 공간을 요구하고 새로운 공간이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낳는다.” 누군가 만든 공간에 좌우되지 말고, 스스로 우리의 공간을 만들라고, 그 권리가 우리에게 있다고 말한다.
결국 모든 것은 사람들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변화는 사람이 만들 뿐. 세상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창작한다면 변화는 우리 손에 있다.” 어디 공간과 디자인뿐이겠는가. 452쪽, 1만9800원.
최현미 기자 ch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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