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권교체에 뒤이어 대법원장이 바뀌고 사법부 발 적폐청산이 2년여 가까이 진행되면서 법원이 걱정스러울 정도로 정치 바람에 휩쓸리고 있다. 그중에서도 11월 19일 전국법관의 대표라는 판사들이 모여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에 연루된 동료 판사들의 국회 탄핵소추를 결의한 사건이 단연 압권이다. 지원장을 포함해 6명이 근무하는 시골 법원인 안동지원 판사들이 ‘탄핵이 필요하다고 전날 의결했다’고 언론에 알려진 11월 13일만 해도 법관대표회의가 6일밖에 남지 않아 의안으로 채택되기 어려울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았다. 의안으로 채택되기 위해선 회의 7일 이전에 안건이 발의돼야 하기 때문이다. 또 아직 검찰 수사가 진행 중이고 유무죄 판결 등의 사법적 판단이 나오지도 않은 상태라 법으로 밥 먹는 판사들의 대표들이 섣불리 탄핵 요구를 의결하기가 어려울 것이란 판단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잘 짜인 각본에 따라 전광석화처럼 움직인 ‘조직된 소수’의 승리로 끝났다. 그날의 법관회의는 정치판을 능가하는 정치 기술을 보여줬다. 먼저, 현장에서 기습적으로 탄핵 안건이 상정됐고, 격렬한 찬반 토론 끝에 단 1표 차이로 가결됐다. 안건을 상정한 사람은 법관회의 부의장으로 법원 신주체세력의 핵심인 국제인권법연구회 회원이고, 이를 받아준 의장은 인권법의 전신격인 우리법연구회 회장 출신이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두 모임의 회장을 역임했다. 전국 각급 법원을 대표한 상당수 판사는 “수사와 재판이 안 끝났는데, 법관대표들이 탄핵을 가결하면 수사에 악영향을 미치고 향후 열릴 재판부에 유죄를 선고하라고 압박하는 것이 되는 등 또 다른 사법 적폐에 다름 아니다”고 반대했으나 철저히 묵살됐다. 논란 끝에 119명 중 105명이 투표에 참여해 53명 찬성으로 이 엄청난 사안이 통과됐다. 기껏해야 직권남용 혐의가 적용될지 말지도 애매한 사건에 연루된 동료 판사들의 탄핵촉구를 달랑 1표 차이로 명색 법관대표들이 의결한 것이다.
이번 사태는 앞으로도 이들 조직된 소수가 법원의 중요한 사안을 다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좌지우지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국제인권법연구회 소속 판사는 465명으로 전국 판사 2964명의 15.7%다. 이 정도면 법원을 마음대로 끌고 가기에 충분하다. 회의록을 읽어보면 대표법관 중에서도 판사탄핵에 반대하는 비중이 상당하고, 법관 전체로는 압도적 다수가 반대인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이들이 중차대한 사안에 조직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개인 차원에서 그때그때 사안별로 발언하고 있을 뿐이라는 데 있다. 이래서는 백전백패다. 이젠 판사가 재판 서류를 열심히 읽고 좋은 판결만 고민하면 되는 시대는 불행히도 끝난 것 같다. 마침 대법원은 판사들의 추천을 받아 대법원장이 법원장을 임명하는 제도를 의정부·대구 지방법원에 한해 우선 도입한다고 발표했다. 이대로 가면 전국 법원장도 특정 조직이 말아먹게 생겼다. 이제부턴 온건·합리·보수 성향 판사들도 조직을 만들고 우선 자신이 소속한 법원의 법관대표에 출마하길 바란다. “정치를 외면한 가장 큰 대가는 자기만 못한 사람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일세”. 2400년 전쯤에 플라톤이 ‘국가론’에 기록한 소크라테스의 충고다.
sdg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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