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속한 북핵 폐기 가능성이 더 멀어지면서 국제사회 우려가 고조되고 있는데, 국책연구기관인 통일연구원이 12일 평화협정 초안을 내놓고 학술회의도 열었다. 초안임을 감안해도 그 내용은 황당하고, 공개 시점은 더 부적절하다. 연구원 개인의 아이디어 차원을 넘어 정권 핵심세력과 교감 하에 이뤄진 것이라면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김정은 답방을 위한 선물용(用) 아니냐는 의심까지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9조 34항으로 구성된 초안의 골격은, 2020년 초까지 북한의 비핵화가 약 50% 진척될 경우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이후 90일 안에 유엔군사령부를 해체해 남·북·미·중이 참여하는 한반도 평화 관리위원회를 설치하자는 것이다.
비핵화 100% 완료가 확인되고, 핵 재개발을 완벽하게 감시할 장치가 갖춰지기 전에는 평화협정은 무의미하다. 절대무기인 핵폭탄 한 방이면 대한민국 안보는 끝장나기 때문이다. ‘비핵화 50%’ 산정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편의상 10%, 20% 등을 언급할 수 있지만, 그런 표현은 핵무기 보유를 인정해주자는 것이나 다름없다. 국제사회가 돌이킬 수 없는 핵폐기(CVID)나 완전한 핵폐기(FFVD)를 강조하면서, 그때까지는 제재를 유지하기로 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비핵화의 ‘절반’ 단계에서는 제재 해제도 안 된다. 비핵화 협상이 잘 진행돼도 핵 폐기 완료 때까진 긴 시간이 걸린다. 그나마 협상도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상황이 이런데도 2020년 초에 미국·중국까지 참여하는 평화협정 체결 주장을 지금 발표하는 것은 잠꼬대나 다름없다.
지금은 평화협정 논의가 아니라 북핵 폐기 대책에 집중해야 할 때다. ‘핵 문제가 해결되면’이라는 전제 위에서 그 뒤의 장밋빛 청사진을 논의하는 것은 사상누각을 짓는 일이다. 핵 폐기라는 초점을 흐림으로써 결과적으로 비핵화를 저지하는 역효과까지 낳는다. 현재 북한이 비핵화의 출발점인 핵 리스트 신고조차 거부하는 상황이어서 더욱 그렇다. 나아가 초안에 ‘비핵화 완료 후 주한미군 감축’ 조항까지 포함된 것은 저의가 의심스럽다. 평화협정을 해도 주한미군과는 상관이 없다고 한 문재인 대통령 발언과도 배치된다. 평화협정엔 한·미 동맹을 흔들 조항이 아니라, 한반도 평화를 깬 북한의 전쟁 책임을 묻는 내용부터 담겨야 한다. 종합적으로 이 초안은 대한민국 입장보다 북한 입장을 더 대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