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이라면 정조시대를 어떻게 다스렸을까요?”

정조 시대를 강의하는 시간에 어떤 분이 던진 질문이다. 정조가 다스렸던 18세기 후반은 변화와 희망이 꿈틀대던 시기였다. 서울 등 대도시로 인구가 집중되면서 주변 지역에 채소 과일 등 상업적 농업이 발달했고, 금난전권(禁亂廛權)의 혁파로 신흥 상업세력이 부상했다. 서얼과 아전 등은 자신들에게 씌워진 신분적 제약을 타파하기 위해 통청(通淸)운동을 전개했으며, 15만여 명이 과거를 보겠노라며 하루 동안 도성 안을 가득 메우던 ‘과거 열풍’의 시대였다. 그런가 하면 과거 시험과는 무관하게 자신만의 전문분야에 몰두하는 마니아 그룹이 등장했고, 소설을 목판으로 찍어 돌려야 할 만큼 문화가 번성하던 시대이기도 했다.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정치에 있다. 정확히 말하면 백성들의 기대에 못 미치는 정치가들의 수준이 문제다. 당시 백성들이 국가에 바라는 것은 민생이었다. 1796년의 ‘병진대기근’처럼 민생이 위태로울 때 여유 있는 지역의 곡식을 흉년 지역으로 신속히 옮기는 일이 그 예다. ‘삼정(三政)’으로 표현되는 왜곡된 수취체제와 관권남용 구조의 혁파 역시 절실했다. 백성들을 보호하고 사회질서를 유지한다는 게 명분이지만, 실제로는 관리들의 이익을 보장하고 기득권을 지키는 체제에 대한 전면적인 개혁이 시대적 과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정은 ‘삐걱거리는 두 수레바퀴처럼’ 서로의 단점을 헐뜯는 데만 골몰하고, 민생은 나 몰라라 하고 있었다. 정조에 따르면 그 원인은 당사(黨私), 즉 붕당이라는 사사로운 조직에 있었다. 선조 때 생긴 붕당은 국왕의 전제나 외척과 권신의 전횡을 방지할 수 있는 이른바 사림(士林) 세력의 정치조직으로 인식되면서 성장하였다. “붕당이 성할수록 왕은 더욱 성군이 되고 나라가 더욱 편안하게 된다(黨益盛 而君益聖 國益安)”는 이이의 말은 그런 인식의 반영이었다. 이이의 생각은 한마디로 인간의 권력욕을 은폐 내지 억압하기보다 반대로 양성화하고 분별해주면서 그 에너지를 긍정적인 쪽으로 이끌어 가자는 것이었다.

박현모 여주대 세종리더십연구소장
박현모 여주대 세종리더십연구소장
그런데 정조도 언급했듯이 권력욕에서 발원되는 에너지를 순기능화하려면 정치의 방향이 정립되어야 한다. 민우국계(民憂國計·민생과 국가경영의 계책)를 위해 붕당들끼리 경쟁을 벌이도록 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정치의 중심’이 바로 서야 했다. 집의 용마루(屋極)에 비유되는 국왕이 중심에 서서 붕당 간 대립을 중재하고 시비를 판명해야 한다는 게 정조의 생각이었다. 실제로 국왕이 균형을 유지하면서 붕당 간 정책 경쟁을 벌이게 했을 때는 상당한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신해통공이라는 경제정책과 수원화성 신도시 건설이 그 예다. 재위 중반부의 정조 시대를 보면, 지도자가 시대의 요청에 정신을 집중하고 그것에 인재들의 에너지를 쏟아붓게 할 때 얼마나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아쉬운 것은 재위 후반부에 들어선 정조의 태도였다. 그는 생부 사도세자의 명예 고양과 이복동생 은언군 석방 등 친인척 문제에 매달렸다. 왕의 이러한 행동에 대해 신하들은 상소를 올리는 것은 물론이고 혈서까지 써 가며 반대했다. 영조의 후비 정순왕후까지 나서서 단식투쟁을 벌이는 등 정국이 요동쳤다. 정조는 말년에 “정치가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개탄했다. “무리 지어 들고 일어나 나를 공격한다”고도 말했다. 대체 정조는 왜 중반부를 지나면서 초심을 놓아버린 것일까?

이렇게 볼 때 “처음부터 끝까지 바르게 다스린(終始以正) 임금”이라는 세종에 대한 사후 평가가 새롭게 다가온다. 일관된 자세로, 민우국계의 정책을 지속적으로 제시하라. 그래서 정치 에너지를 쉴 새 없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끌어가라. 세종이라면 아마도 정조 시대는 물론이고 지금 우리에게도 이런 조언을 하지 않을까?

여주대 세종리더십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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