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본가의 탄생 / 그레그 스타인메츠 지음, 노승영 옮김 / 부키
獨 대부호 푸거 일대기 다뤄
카를5세 황제 옹립 자금대고
“빚 갚아라” 독촉장 날리기도
고리대금 금지조치 해제 강권
씀씀이 컸던 교황 면죄부 남발
결과적으로 종교개혁의 ‘불씨’
그 한 사람의 이름은 야코프 푸거. 독일 아우크스부르크 출신으로, 후세에는 은행가로 알려졌지만 능수능란한 상인이었고, 제아무리 높은 권력자에게도 돈을 갚으라고 독촉장을 날린 희대의 거물이었다. 그가 독촉장을 날린 대표적인 인물은 카를 5세. 카를 5세가 어떤 인물이던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자 스페인·나폴리·예루살렘의 국왕이며 아시아·아프리카의 군주 등, 그를 부르는 칭호만 80개가 넘는 당시 유럽의 절대 권력자였다. 심지어 그의 몸을 만지면 병이 낫는다며 신으로까지 추앙받는 인물이 바로 카를 5세였다. 그런 이에게 푸거는 이런 문구가 담긴 독촉장을 당당하게 날린다. “소신이 없었다면 폐하께서는 황제관을 쓰지 못하셨을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카를 5세는 푸거의 돈에 의지해 황제가 됐고, 재임 기간 내내 그의 금고를 두드렸다. 대가로 푸거에게 인쇄기 통제권 등을 주었는데, 언론이랄 것이 별것 없던 세상에서 푸거는 정보 통제권을 장악하게 된 것이다.
푸거 집안은 직물 매매가 주업이었는데, 본능적으로 돈의 향방을 감지한 푸거는 ‘채권 방식의 대출’로 부를 늘려갔다. 푸거는 무역이 활발해지고 전쟁이 빈번하게 벌어지는 시대에 은과 구리만큼 가치 있는 것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가 돈을 빌려주면서 광산의 채굴권과 소유권을 획득한 이유다. 그는 눈앞의 돈이 최고인 시대, 즉 장기투자라는 개념조차 없던 시대에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광산을 개발한다. 당시 최대 구리 광산은 오스만 튀르크의 침공이 빈번한 헝가리에 있었다. 독일왕 막시밀리안은 이 지역을 호시탐탐 노렸는데, 그의 돈줄 역시 푸거였다. 막시밀리안이 빈에 이어 헝가리까지 손에 넣자 그곳으로 달려가 구리 광산을 매입했고, 거대한 구리가공 공장까지 만들었다. 유럽의 돈이 푸거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푸거의 영향력은 종교개혁과도 연관이 깊다. 푸거는 유명무실한 고리대금 금지법을 사실상 폐지하는 데 일조했다. 그는 ‘고리대금업자에 유대인이라고 저주를 퍼붓는’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많은 사람이 내게 적대적이다. 그들은 내가 부자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고 하느님의 은총으로 부자가 됐다”고 떳떳하게 고백했다. 그는 자신이 돈줄인 교황 레오 10세에게 고리대금 금지 조치를 해제하도록 강권했다. 돈 씀씀이가 컸던 레오 10세는 면죄부를 남발했고, 격분한 루터가 종교개혁의 횃불을 들 수밖에 없었다. 루터는 면죄부가 “저주에 대한 대중의 두려움을 이용해 돈을 벌려는 로마의 수작”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더욱이 프랑스나 스페인보다 힘이 약한 독일에 면죄부 판매를 강화하는 교황의 처사에 항거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부자가 되었기 때문일까. 푸거의 탐욕은 결과적으로 종교개혁의 불씨가 됐다.
1525년 독일에서 일어난 대규모 농민 봉기인 ‘독일농민전쟁’을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대결의 전초전’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이 사건의 배후에도 푸거가 있다. 물론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것은 아니지만, 푸거는 당대 지식인과 노동자의 적이었다. 그가 운영하는 광산의 근무 조건은 최악이었고, 은행가의 탈을 쓴 고리대금 이자는 말로 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초기 농민군의 위세는 대단했지만, 푸거에게 자금줄을 댄 페르디난트 대공을 이길 수는 없었다. 농민 지도자 중 가장 위협적인 토마스 뮌처를 제압한 것도 푸거의 돈이었다.
‘자본가의 탄생’에 따르면 푸거의 삶은 말 그대로 돈으로 점철됐다. 아니, 어쩌면 종교와 정치마저 휘하에 두고자 했던 권력지향적인 인물일 수도 있다. 평가는 읽는 이의 지향에 따라 극과 극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그가 남긴 자취만큼은 면밀하게 따져봐야 할 것이다. 역사를 통해 과거 인물들의 삶을 읽어내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384쪽, 1만8000원.
장동석 출판평론가·뉴필로소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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