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에서 세종 시대는 매우 예외적인 시기였다. 공격적인 대외 정벌로 외적의 약탈을 두 차례나 선제적으로 막아낸 경우는 삼국 통일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재위 초반의 대마도 정벌과 중반의 파저강 토벌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의 군사행동은 여러 면에서 비교된다.

먼저 전과(戰果)의 차이다. 1433년 계축년에 서쪽 지역의 여진족을 토벌했다 하여 ‘계축서정(癸丑西征)’이라 불리는 파저강 토벌의 경우 1만5000여 명의 군사로 431명의 여진족을 참살하거나 생포했다. 이에 비해 대마도 정벌, 즉 1419년 기해년에 동쪽에 있는 왜구를 대상으로 한 ‘기해동정(己亥東征)’은 1만7000여 명의 군사로 135명을 참획하거나 사로잡는 데 그쳤다.

더욱 중요한 것은 파급효과다. 알려진 것처럼, 계축서정의 결과 조선은 영토 확장(4군 6진)이라는 더 큰 후속 성과를 거뒀다. 기해동정도 물론 극성스러운 왜구의 약탈을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별다른 후속 조치 없는 일회성 군사행동으로 끝났다. 특히 당시 조선과 일본 양쪽을 오가며 등거리 외교를 하던 대마도를 우리 영토로 끌어들이지 못한 것은 대단히 아쉽다. 이 점에서 대마도 정벌을 실패 경영의 측면에서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세종 재위 1년인 1419년에 단행된 대마도 정벌은 이해 5월 7일 왜구의 비인현 공격을 계기로, 6월 20일부터 7월 3일까지 약 보름간 대마도의 두지포 일대를 공격한 군사행동이다. 이 시기는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지 9개월가량 된 때로 상왕 통치기였다. 군사 등 주요 국정을 좌우하던 태종에 의해 대마도 정벌이 진행됐다는 얘기다.

박현모 여주대 세종리더십연구소장
박현모 여주대 세종리더십연구소장
토벌 계획은 태종이 제안했고 병조판서 조말생이 지지했다. 대다수 신하는 침묵 내지 다른 의견을 갖고 있는 상태에서, 태종의 위엄을 겁내 충분한 토의가 이뤄지지 못했다. 그 결과, ① 초기 출범의 지연(마파람으로 거제도에서 3일간 지연) ② 봉쇄정책의 한계(현지 중국인의 말을 듣고 섬을 포위했으나, 식량 등 장기전 대비를 하지 못함) ③ 군령체계의 혼란(상왕-주상-영의정 유정현-도체찰사 이종무 사이 역할 조정이 잘 안 됨) ④ 총사령관 이종무 등의 소극적 태도(자신은 배에서 머물며 장수들에게 상륙 지시, 박실 장군의 패전) ⑤ 적장의 항복 없는 회군 ⑥ 재차 정벌 없는 일회성 토벌(박은의 제안 무산) 등의 문제가 노정됐다. 한마디로 위로부터 내려가는 국정 운영 방식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줬다.

만약 세종 방식에 따라 대마도 정벌이 이뤄졌다면 어땠을까? 우선 일본 및 유구 등 주변국들과 ‘왜구 제압’이라는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 힘썼을 것이다. 파저강 토벌을 위해 세종이 명나라와 공동 목표(여진족 통제)를 공유하는 데 정성을 쏟은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이해가 걸린 국가들의 지지 내지 묵인이라도 받아내는 것은 국제정치 행위에서 필수다. 다음으로 정벌 전략에 대한 충분한 내부 소통을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세종이 파저강 토벌 때 세 차례에 걸쳐 신하들과 열띤 토론을 벌인 것은 ‘토론의 예방적 효과’를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구성원들로 하여금 자신이 맡은 역할을 숙지하도록 하는 학습 과정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총사령관에게 재량권을 위임해 작전을 수행하게 하되, 정벌 후의 대책을 함께 마련하는 일이다. 파저강 토벌 직후 세종이 “다행히 크게 승리했으니 진실로 기쁜 일이나 두렵다. 어떻게 이 공을 보전하여 영구히 후환을 없앨 것인가”라고 물었던 것처럼, ‘대마도 정벌 이후’를 묻고 대책을 세웠더라면 어땠을까? 600년 전 기해년의 실수가 대한민국의 국방과 외교에서 되풀이돼서는 안 되겠다.

여주대 세종리더십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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