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계위해 14세때 국악의 길
군예대·국립국악원 거치며
자긍심으로 60년 넘게 불러
정악 넘어서 민속피리도 배워
28년前 ‘정재국류 산조’ 탄생
1998년엔 ‘대취타’ 보유자로
영향 안받은 연주자 없을정도
현직 물러나서도 후학 양성
“희로애락 표현하는 피리소리
많은 사람 함께 감상했으면”
국악 분야에서 궁중제례악 등을 지칭하는 정악(正樂)은 판소리로 대변되는 민간음악인 이른바 민속악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그 같은 정악을 거론하는 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국가무형문화재 제46호 피리정악 및 대취타 보유자인 정재국(77) 명인이다.
“열네살 때 국악사양성소(현 국립국악중고등학교)에 들어가 처음 피리를 접하고 배웠으니, 그동안 피리를 60년 넘게 불러온 셈입니다. 처음에는 먹고사는 문제 해결을 위해 피리를 배웠지만 언제부터인가 피리라는 악기가 지닌 매력에 큰 자긍심을 지니게 됐습니다.”
서울 서초구 서초동의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만난 정 명인은 정악에서 차지하는 피리의 중요성부터 먼저 언급했다. 피리는 가느다란 대나무로 만든 작은 악기지만 국악기 중에서 중심역할을 한다. 정악곡 중 대부분은 피리가 주선율을 담당하고 관현합주에서도 곡의 분위기를 이끌어가는 주요 역할을 담당한다.
정 명인은 그처럼 정악에서 중요한 피리연주자 중에서도 오랜 기간 목피리잡이(여러 피리연주자 중 수석)를 했고, 피리 연주를 통해 1998년 국가무형문화재 제46호 피리정악 및 대취타 보유자로 지정됐다.
국립국악원에서는 2차례나 국립국악원 정악단 예술감독(1996∼1998, 2014∼2016)을 했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음악과 교수(1998∼2007)로도 수많은 후학을 양성했다.
정 명인과 피리와의 인연은 ‘가난’ 때문이었다.
1942년 충북 진천에서 태어난 정 명인은 네 살 되던 8·15 광복 때 아버지를, 아홉살 때엔 6·25전쟁으로 어머니를 여의었다. 그 후 2남1녀의 장남으로 끼니도 잇기 어려워 초등학교도 근근이 마쳤다.
친척집과 고아원을 전전하던 어린 소년에게 6년간 교복과 학용품은 물론, 매달 장학금 3000원까지 주던 국악원 부설 국악사양성소는 그에게 고향이자 부모였다. 그 후 55년간 국악은 그를 먹여살린 은인이 됐다. 국악사양성소에 입학한 그는 김준현·김태섭 같은, 당대 최고의 피리연주자로부터 정악 피리의 진수를 공부하고, 다음 해에는 최인태 선생에게서 대취타를 사사했다.
“제가 국악사양성소를 선택하고 천직인 국악의 길로 들어설 수 있었던 것에 평생 고마움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저는 국악을 하는 것을 정말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유년기의 가난과 외로움을 피리로 이겨낸 그에게 군예대 생활은 아직도 잊지 못할 추억이다.
스물한 살에 강원 화천의 군예대에 입대한 그는 그곳에서 우연하게도 대금 명인 이생강(82·중요무형문화재 제45호 대금산조 예능보유자)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둘은 듀엣으로 활동하며 ‘나그네 사랑’ ‘번지 없는 주막’을 열심히 불어댔다. 그 무렵 같은 군예대에 복무하며 공연에서 사회를 맡았던 부대 고참이 바로 2002년 작고한 코미디언 이주일 씨였다.
1962년 국악사양성소를 졸업하자마자 국립국악원의 피리악사, 악장, 예술감독 등을 역임하며 정악으로도 표현되는 정통아악의 버팀목 역할을 해왔다. 국악인들에 따르면 현재 피리연주자 중 정 명인으로부터 직접 배운 사람이 대부분이며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은 없을 정도다.
특히 우리 국악계에 그가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창작음악의 개척에도 힘을 기울여 1972년 서울 명동극장에서 최초의 피리독주회를 하는 한편, 황병기·서우석·이상규가 작곡한 창작곡을 초연했다. 1990년에는 정악의 테두리를 넘어 민속피리의 명인 이충선 선생에게서 민속피리를 배워 ‘정재국류 산조’를 만들어냈다.
우리 국악을 해외에 알리는 데도 한몫했다. 1999년 러시아의 모스크바 음악원 차이콥스키 연주홀에서 ‘피리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을 연주했고, 2003년 홍콩, 중국 음악원 초청 세계종취악기 연주회에서 독주 및 협연을 했다. 2010년 프랑스 한국문화원 초청 피리독주회에서도 연주를 해 박수를 받았다.
그는 현직에서 물러난 요즘도 직접 피리와 태평소 연주를 하며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또 후학 양성에도 여전히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국립국악원에 한 달에 두 차례 방문해 50여 명의 제자를 가르치고 있으며 이수생은 150여 명에 이른다.
“피리 소리는 가야금 4∼5대가 못 당할 정도로 우렁차 듣는 이를 압도합니다. 자유로운 강약조절로 인간의 희로애락을 표현합니다. 그래서 피리 소리를 천언만어(千言萬語)에 비유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 같은 피리만의 매력을 보다 많은 이들이 함께 감상하고 공유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경택 기자 ktlee@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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