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숙 前 駐유엔 대사

어제 노동당 중앙위원회 본부청사에서 있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신년사는 올해도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전망을 한층 비관적이게 만드는 발표가 돼 버렸다.

우선,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 재개 용의 표명은 2008년 관광객 박왕자 씨 피살과 2016년 핵 및 장거리 미사일 개발로 인해 두 사업이 중단된 배경을 알고 있다면 박 씨 피살에 대한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 핵·미사일 개발 중지에 대한 입장이 전제돼야 하며, 더구나 유엔의 제재와 맞물려 있는 문제다. 그런데 ‘남측 기업의 어려운 사정과 민족 명산을 찾고 싶어 하는 남녘 동포의 소망’을 헤아려 이를 풀어준다니, 엄청난 잘못을 저지르고도 시간이 흘렀다는 이유만으로 뻔뻔스럽게 말하는 후안무치의 정도가 지나치다. 전제조건과 대가가 없다는 말도 뜻이 모호하지만, 그 의미를 북측에 물어볼 필요도 없을 듯하다. 필경 제재를 우회하면서 나중에 다른 요구를 해올 함정일 테니까.

연합군사훈련과 외부로부터 전략자산 반입을 중지하라는 주장은 지난해 9·19 남북 군사분야 합의서를 서명, 교환할 때부터 우리 내부에서 심각한 우려가 제기됐듯이 북한으로서는 당연한 요구 수순이 아닐 수 없다. 심하게 말하면, 앞으로 남북 군사공동위원회는 한·미 군사동맹을 약화시키는 역할을 공식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기이한 모양새가 됐다. 최근 방위비 분담 협상이 해를 넘기며 타결이 지연되고 있다. 또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동맹을 가치와 전략으로서가 아닌 금전 거래의 차원에서 바라보며 방위비를 대폭 증액하지 않을 경우 주한미군 규모를 감축한다거나 전략자산 전개 시 소요 비용을 한국에 떠넘기려는 생각까지도 하고 있다고 알려졌다. 치명적 중요성을 가진 안보에 있어서 미국과 북한 양쪽으로부터 협공을 받는 상황이다. 국가 안보, 한·미 동맹, 적정한 방위비 분담을 함께 지키려면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평화체제 추진을 위한 다자 협상이나 평화통일 방안 모색은 궁극적으로 진지한 검토가 필요한 의제임에 틀림없으나 지금은 때가 아니다. 북한으로서는 비핵화 논의에 혼선을 야기하기 좋은 책략이 아닐 수 없다. 김정은은 완전한 비핵화로 나가려는 게 자신의 확고한 의지라고 했으나, 이는 신년사 앞부분에서 지난해 4월 당 중앙위 제3차 전원회의 결과 경제 및 핵무력 건설 병진 노선의 승리를 언급한 것과 직접적으로 모순이 된다.

더욱이, 더 이상 핵무기를 만들지도 않고, 시험·사용·전파도 하지 않겠다고 언급했으나, 이는 1992년 남북한 간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제1항에서 남과 북이 핵무기의 시험·제조·생산·접수·보유·저장·배비·사용를 하지 않겠다고 한 것과 비교하면, 접수·보유·저장·배비라는 표현이 빠짐으로써 기존의 핵무기는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도가 명확히 짚인다. 구호로 ‘완전한 비핵화’를 말하지만, 비핵화의 개념과 구체적 조치에 대한 언급도 없이 끝없는 과정 공방이 실질 문제 진전을 방해하며 상황을 표류시키고 있다.

김정은의 신년사가 모순과 함정적 언어로 가득 차 있다면 새해에도 비핵화 진전은커녕 조만간 미·북 간 정상회담 개최도 큰 기대를 불허한다. 지난해 하반기는 파국 없는 정체 상황이었다. 하지만 김정은이 양복을 입고 소파에 앉아 신년사를 발표하리라는 예측을 못 했듯이 미국과의 커다란 입장 차이로 인해 언제 모험주의로 돌변할지 장담할 수 없다. 김정은 신년사를 덕담과 소망 수준에서 해석하지 말라! 우리 스스로에 대한 경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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