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6월 문을 연 동네 책방이자 북카페 ‘세런디피티 78’에서 김영화(사진 왼쪽)·박영민 부부가 책을 꺼내 보고 있다. 부부는 퇴직 후 노후의 삶의 방식에 대한 해답을 헬렌 니어링과 스콧 니어링 부부가 쓴 책 ‘조화로운 삶’에서 찾았다고 했다.   김호웅 기자 diverkim@
지난해 6월 문을 연 동네 책방이자 북카페 ‘세런디피티 78’에서 김영화(사진 왼쪽)·박영민 부부가 책을 꺼내 보고 있다. 부부는 퇴직 후 노후의 삶의 방식에 대한 해답을 헬렌 니어링과 스콧 니어링 부부가 쓴 책 ‘조화로운 삶’에서 찾았다고 했다. 김호웅 기자 diverkim@
북카페 ‘세런디피티78’ 운영 박영민·김영화 씨 부부

16년전 니어링 부부에 감명
자연에서 조화로운 삶 꿈꿔

사서였던 아내가 먼저 시작
교수 남편 자연스럽게 합류
지난해 6월 북카페 문 열어

남편은 지렁이농법으로 농사
아내는 매주 독서모임 이끌어
정기적인 미술전시회·강연도

부부에게 10년뒤 모습 묻자
“지금처럼 생활하는 것이죠”


경기 여주에 ‘명품로’란 이름의 길이 있다. 길 이름이 ‘명품’이니 번듯하고 근사할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차 한 대 간신히 지날 정도로 농로와 다름없는 시멘트 도로다. 길이 숨어있는 데다 좁기까지 해서 초행이라면 잘 못 들기 십상이다. 짐작건대 길에 붙인 ‘명품’이란 이름은, 영동고속도로 건너편 여주 프리미엄 아울렛에서 파는 고가상품 브랜드를 지칭하는 그 ‘명품’에서 따온 것이겠다. 이런 무성의하기 짝이 없는 작명이라니…. 동네 책방 겸 북카페 ‘세런디피티 78’은 여기 여주의 명품로에 있다. ‘세런디피티 78’은 ‘진짜 명품’ 같은 은퇴 이후의 삶을 지향하는 박영민(57)·김영화(56) 씨 부부가 운영하는 곳이기도 하고, 거주하고 생활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동네책방이자 북카페가 상호로 삼은 세런디피티(Serendipity)는 ‘뜻밖의 행운’쯤으로 번역된다. 뒤에 붙은 78이란 숫자는 중의적이다. 숫자의 모티브는 ‘전체 결과의 80%가 전체 원인의 20%에 의해서 일어난다’는 ‘파레토의 법칙’에서 가져왔다. 파레토의 법칙은 ‘이탈리아 인구의 20%가 이탈리아 전체 부의 80%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 이탈리아 경제학자 빌프레도 파레토의 이름에서 따온 것, 아내 김 씨는 “세상을 이끄는 20이 아니라 나머지 80을 지향하며 살겠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숫자가 이론 속의 80이 아닌 78인 것은, ‘뜻밖의 행운’이 좌우하는 ±2를 감안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78이 상징하는 또 다른 의미도 있다. 남편 박 씨가 설명했다.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 대국에서 딱 한 판을 이세돌이 이겼는데, 그때 이세돌이 놓은 결정적인 한 수가 78번째로 놓은 바둑돌이었단다. 무심결에 놓았으되 인공지능(AI)으로는 도저히 분석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오묘한 한 수. 78이란 바로 그 수를 의미한단다.

동네 책방 겸 북카페라고 소개했지만 ‘세런디피티 78’은 정체불명의 공간이다. 책을 팔고 있으니 동네 책방이기도 하고, 커피를 마시며 마음대로 책을 뽑아 읽을 수 있으니 북카페이기도 하다. 그런데 어떤 때는 다양한 분야의 강의가 진행되는 강연장이 되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독서토론이나 시 쓰기 모임이 열리는 커뮤니티 공간이 되기도 한다. 여기서 여럿이 함께 영화를 보기도 하고, 도자기나 그림 전시를 하기도 한다. ‘이러이러한 곳’이라고 한마디로 규정할 수 없는 곳이란 얘기다. 문화를 유통하고 소비하는 ‘플랫폼 공간’이라는 게 그중 정확한 표현이겠다.

‘세런디피티 78’은 외양부터가 특별하다. 철제 빔으로 지은 간결한 철골조의 건물인데 짙은 포도주색의 외벽으로 북유럽 스타일의 느낌이 물씬 풍긴다. 농로가 지나는 들판의 형태도 색깔도 ‘튀는’ 이국적인 건물이 서 있으니 한눈에 확 띈다. 지도를 들고 찾아가기란 쉽잖지만, 독특한 건물을 눈으로 보고 길로 들어서면 누구라도 금방 찾아갈 수 있을 정도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천장이 높아 개방감이 대단했다. 천장의 높이가 8.3m. 아파트 3층 높이를 넘는다. 애초에 2층 구조로 설계했다가, 단층으로 짓는 바람에 그렇게 됐다고 했다. 건물의 평면도는 ㄱ자의 형태인데, 한쪽은 카페로, 다른 한쪽은 모임 공간으로 쓰고 있다. 개방감과 함께 인상적이었던 건 채광이었다. 해가 잘 드는 남쪽의 벽 전체가 유리창이다. 높은 천장까지 한쪽 벽을 모두 유리로 마감했으니 빛이 실내로 마치 폭포처럼 들어왔다. 바깥은 영하의 날씨였는데도, 유리창으로 들어온 볕에 달궈져 덥다고 느껴질 만큼 훈훈했다.

‘세렌디피티 78’의 주인은 굳이 따지자면 남편이 아니라 아내 김 씨다. 올해로 21년째 여주대 치위생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남편은 아직 현역이지만, 학교 도서관 사서로 일했던 아내는 4년 전에 학교를 그만두고 은퇴했다. 여기저기 몸이 아파서 스스로 선택한 은퇴였는데, 은퇴 이후의 삶에 대한 고민은 전혀 없었다. 부부는 이미 16년 전에 은퇴 이후의 ‘삶의 방식’에 대한 답을 구해놓은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모든 것은 책 한 권에서 시작됐다. 오래전에 삶의 방식을 정해놓을 수 있었던 것도, 세런디피티 78이란 공간을 만들었던 것도, 그 공간에 책을 들여놓고, 강연과 토론으로 이웃들과 교유하며 지내고 있는 것도 다 한 권의 책 덕분이었다. 그 책이란 다름 아닌 헬렌 니어링과 스콧 니어링 부부가 쓴 ‘조화로운 삶’. 한내초등학교 도서관 사서로 재직 중이던 아내 김 씨가 2003년에 남편에게 이 책을 건넸다. 남편 박 씨는 아내가 그 책을 자신에게 ‘던져줬다’고 말했다. 부부의 삶의 가치관을 극적으로 바꾼 책을 손에 쥐게 된 ‘우연’을 강조하려는 표현이었다.

니어링 부부의 책 ‘조화로운 삶’은 미국이 대공황의 늪으로 빠져들던 1930년대, 더 이상 서구도시 문명에서 살 수 없다고 생각한 니어링 부부가 시골 마을로 들어가 ‘삶의 조화’를 생각하며 살았던 생활을 기록한 책이다. 니어링 부부가 말한 조화로운 삶에는 원칙이 있었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다. 먹고 사는 것의 절반쯤은 자급자족한다. 충분할 정도의 양식을 모으면 돈 벌 일을 하지 않는다. 되도록 다른 사람과 힘을 합쳐 일을 해낸다. 집을 멋지게 고치느라 시간을 쓰지 않는다. 니어링 부부는 그 지역에 흔한 돌을 이용해 집을 짓고, 나무를 심고, 밭을 일구어 채소를 길렀다. 채소 위주로 생식하고 남는 시간에 책을 쓰고 음악 활동을 하고 강연을 했다.

박 씨 부부는 이 책을 읽고 니어링 부부의 삶에 큰 감명을 받았다. 부부는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니어링 부부가 말한 ‘조화로운 삶’을 위한 노력을 기울여왔다. 이를테면 미생물학을 전공한 뒤 치위생학과 교수로 일하는 남편 박 씨가 치과와는 전혀 관계없는 지역의 농민을 위해 미생물을 활용한 지렁이농법을 연구하기 시작한 것도, 니어링 부부가 말한 ‘불안과 해체의 시대에 되도록 여러 사람과 함께 건전한 상식을 잃지 않는 삶의 방식’을 따르기 위한 것이었다. 직업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박 씨는 연구한 지렁이 농법을 적용해보기 위해 땅을 사서 손수 포도농사를 지을 정도로 몰두했다.

‘세런디피티 78’이 들어선 자리의 땅 400평도 포도농사를 짓기 위해 구입한 것이었다. 명소나 관광지를 만들고자 했다면 더 넓은 땅이 필요했을 법한데 박 씨 부부는 작은 포도밭과 텃밭을 거느린 400여 평의 땅만으로 충분하다고 했다. 부인 김 씨는 “이리저리 융통한 돈을 다 쏟아부어 건물을 짓는 바람에 건물 뒤쪽의 옹색한 컨테이너 박스를 거처로 쓰고 있는 신세”라며 웃었다.

동네 책방 겸 북카페를 여는 건 남편의 은퇴에 맞춰 오래전부터 계획한 일이었다. 그런데 급작스럽게 북 카페 개업이 앞당겨졌다. 땅을 매입할 당시에 낸 건축 설계허가가 만료를 코앞에 두고 있었는데 허가가 만료되면 다시 허가를 내기 쉽지 않은 상황이라 은퇴한 아내가 나서서 일을 서둘렀던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세런디피티 78’이 문을 연 게 지난해 6월의 일이다. 불과 6개월 남짓이지만 그동안 ‘세런디피티 78’에서는 문학부터 물리학까지 다양한 분야의 강연과 미술 전시회, 정기모임 등이 이뤄졌다. 처음에는 남편 박 씨가 나서 강단의 지인들을 강연자로 불렀지만, 강연과 모임이 활발해지면서 이런저런 인연의 끈이 만들어져 이제는 저절로 강연이 만들어지고 있다.

남편 박 씨가 정치와 과학, 역사 분야를 맡고 있다면, 아내 김 씨는 문화·예술 쪽에 관심이 많다. 김 씨는 매주 ‘북 세이(Book say)’라는 독서 모임과 시집을 선정해 함께 읽은 뒤 토의하는 ‘시 모임’을 이끌고 있다. 부부의 관심 분야는 사뭇 다르지만, 이들이 강연이나 모임을 통해 말하고 싶어 하는 이야기의 주제는 같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은퇴 이후의 자유가 주어졌을 때 우리는 무엇에 가치를 두고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모색이다. 박 씨 부부에게 앞으로 10년 후의 ‘세런디피티 78’의 목표를 물었다. 되돌아온 대답은 뜻밖에도 ‘지금처럼’이었다. 그렇다면 부부가 꿈꿨던 ‘은퇴 이후의 모습’은 지금의 생활로 이미 완성한 셈이다.

여주 = 박경일 기자 parking@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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