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 음악가 제도는 음악가와 청중이 일회성으로 만나는 것이 아닌, 흥미로운 음악 여정에 동행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유럽과 미국의 주요 공연장 및 관현악단은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시즌별로 상주 음악가를 선정해 다양한 방식으로 관객과 만나 왔다. 한 작곡가의 작품을 집중 조명하거나, 연주자들이 새로운 조합을 이루어 특색 있는 프로그램을 마련하는 식이다. 한 번의 공연으로는 알 수 없던 연주자의 예술관을 깊이 있게 들여다볼 수도 있고, 잘 몰랐던 작품을 알게 되거나 평소 즐겨 듣던 곡이라도 그 안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발견하게 될 수도 있다. 한국의 서울시립교향악단과 금호아트홀도 2019년의 음악가를 선정해 그 첫 번째 프로그램을 열었다.
서울시향 올해의 음악가는 독일 출신 바이올리니스트 크리스티안 테츨라프(사진)다. 지난 5∼6일 예술의전당과 롯데콘서트홀에서 수석객원지휘자 마르크스 슈텐츠와 시마노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을 협연하고, 7일에는 서울주교좌성당에서 바흐 무반주 파르티타 2번, 소나타 3번과 드보르자크 현악 5중주 3번을 선보였다.
무엇보다 테츨라프가 연주하는 바흐를 무대와 객석의 구분이 따로 없는 서울주교좌성당에서 들을 수 있었던 건 행운이었다. 테츨라프가 연주하는 바흐의 무반주 파르티타 2번은 그동안 들었던 해석들과는 크게 달랐다. 감정 표현의 절제로부터 빚어낸 경건한 음악이 아닌, 인간의 절망과 좌절, 울분이 그대로 녹아 있는 음악이었다. 테츨라프는 한없이 나약한 인간의 처절한 노래를 템포를 매우 빠르게 설정한 채로 들려주었다. 이어진 무반주 소나타 3번에서도 테츨라프는 300여 년 전 음악을 그대로 불러오는 것이 아닌, 자신만의 새로운 해석을 펼쳐보였다. 스코어를 그대로 읽어 표현하는 연주자가 보여줄 수 있는 최대의 창조성을 목도하는 느낌이었다.
전날 슈텐츠가 지휘하는 서울시향과 선보인 시마노프스키 협주곡 1번에서도 테츨라프는 정제된 테크닉보다는 작품이 지닌 서사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직관적이기까지 한 몇몇 표현들은 그가 확신을 가지고 설계한 긴 프레이즈 안에서 매혹적으로 빛났다. 이번 연주회를 통해 그가 사용하는 모던 악기의 개성도 엿볼 수 있었다. 날렵하고 관능적인 한편, 따뜻하고 깊이 있는 풍부한 심상은 상대적으로 느끼기 어려웠는데, 5년 전 테츨라프 콰르텟 내한 공연에서 선보였던 실내악 무대와 이번 협연 및 독주의 인상을 비교해볼 때 자신이 의도하는 바를 쉽게 연출해낼 수 있다는 것이 테츨라프가 이 악기를 택한 이유가 아닐까 추측해본다.
이번에 슈텐츠와 서울시향이 선보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알프스 교향곡’과 단원 한지연(바이올린), 강윤지·성민경(비올라), 심준호(첼로)가 테츨라프와 연주한 드보르자크 현악 5중주 3번 역시 호연이었다. 서울시향은 두 명의 객원지휘자, 상주 음악가와 함께 음악성을 크게 확장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증명했다.
10일에는 피아니스트 박종해가 금호아트홀의 새해를 열었다. 어둑하고 쓸쓸한, 낭만적인 새해 첫 공연으로 완벽한 연주였다. 그의 음색은 다채롭지만, 오색빛깔 무지개가 아닌 매혹적인 모노톤으로 비유할 수 있을 것 같다. 풍부한 서정과 사색적 면모, 역동성 등 그는 개성 있는 연주자로 오랫동안 사랑받을 수 있는 많은 장점을 지녔다. 다만 감정을 덜어낸 맑고 단정한 터치와의 대비를 이뤄낸다면 한층 더 폭넓은 표현력을 보여줄 수도 있을 듯하다. 발레음악 ‘로미오와 줄리엣’의 발췌곡과 소나타 7번 등 프로코피예프의 작품으로 채워진 2부의 집중도는 압권이었다. 앉은 자리에서 단숨에 이어간 두 개의 프로그램에서 보여준 터질 듯한 박력, 묵직한 타건은 러시아의 데니스 마추예프를 떠올리게 할 정도였다. 박종해는 3·5·8·12월 총 4번의 공연을 이어간다. 테츨라프는 9월에 지휘자 만프레트 호네크와 내한해 협연 및 실내악 무대를 선보인다.
음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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