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권남용罪 모호한 사례
직권남용죄가 그간 실무에서 잘 적용되지 않았던 또 다른 이유는 피해자가 모호하고 미수(未遂)범의 처벌이 명시돼 있지 않다는 등의 문제 탓도 있었다. 최근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박근혜 청와대가 전국경제인연합회를 통해 보수 성향의 시민단체 등에 자금을 지원했다는 이른바 ‘화이트리스트’ 사건이다.
당초 고발이 이뤄지고 박영수 특별검사팀이 초기 수사하는 과정에서 전경련은 청와대와 함께 피고발자에 이름이 올랐다. 일부 진보 성향 시민단체는 2016년 5월 서울중앙지검에 전경련 관계자와 청와대 인사들을 대상으로 고발장을 제출했다. 이후 2017년 초 특검은 청와대 정무수석실 주도로 전경련, 대기업 관계자들이 정기적으로 모여 보수 단체들에 자금을 지원하는 방향을 논의해 왔다고 파악했다. 그런데 2017년 5월 정권이 바뀐 뒤 이어진 검찰 수사에서 전경련은 피해자로 둔갑했다.
전경련 관계자가 수차례 소환조사에서 “청와대의 요청으로 대기업으로부터 자금을 모금해 건넸다”며 “청와대 요구를 거부하는 게 두려워 어쩔 수 없이 들어줬다”는 취지로 당초와 달리 진술을 바꾸면서다.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 등 박근혜 청와대 인사들은 “전경련이 예전부터 지속적으로 하던 시민단체 지원에 대해 청와대 의견을 전달한 것뿐”이라고 주장했으나, 피해자가 명확해지자 직권남용 유죄가 인정됐다.
지난해 10월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으로 구속 기소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사건도 마찬가지다. 임 전 차장이 기소된 8개 죄명 중 핵심은 직권남용이다. 검찰이 그에게 적용한 혐의 대부분은 행정처 기획조정실 심의관이나 일선 법원의 형사수석부장판사 등에게 보고서를 작성토록 해 의무에 없는 일을 하게 했다는 의혹이다. 일부 판사는 당초 검찰에서 피의자 신분으로 입건돼 피의자 진술 조서를 작성한 상태지만, 임 전 차장 공소장에는 직권남용의 피해자로 적시돼 있다.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16일 “직권남용죄가 보호하려는 피해법익은 국가 공무의 공정성으로 일견 국가가 피해자로 보이지만, 또 동시에 범죄 구성요건에서는 특정 피해자를 요구하고 있다”면서 “이 때문에 상명하복 관계에 놓여 있어 위법한 명령이 아닌 이상 따라야 할 의무가 있는 부하직원을 피해자로 봐야 할지, 공범으로 봐야 할지 경계가 모호해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다른 변호사는 “일선 심의관들을 임 전 차장과 공범인 피의자로 만들지, 피해자로 만들지는 순전히 검찰 손에 달려 있다”면서 “명확한 기준이 없다 보니 검찰이 사법처리라는 목줄을 틀어쥐고 있는 형국”이라고 지적했다. 사법부 수사에서는 이와 더불어 내부적 검토보고서만으로 직권남용으로 처벌할 수 있는지가 쟁점이 된다. 임 전 차장 측 변호인은 “구체적 실행행위라면 이미 실행됐으므로 상급자의 직무상 명령이 위법한지 여부에 대한 판단이 가능하지만, 내부적 검토 행위는 설사 과도한 측면이 있더라도 아이디어 차원의 다양한 검토 자체를 위법하다고 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직권남용죄에 미수범 처벌 규정이 없는 이상 검토보고서 작성 자체만을 단죄하기는 어렵다는 지적이다.
김리안 기자 knra@munhwa.com
직권남용죄가 그간 실무에서 잘 적용되지 않았던 또 다른 이유는 피해자가 모호하고 미수(未遂)범의 처벌이 명시돼 있지 않다는 등의 문제 탓도 있었다. 최근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박근혜 청와대가 전국경제인연합회를 통해 보수 성향의 시민단체 등에 자금을 지원했다는 이른바 ‘화이트리스트’ 사건이다.
당초 고발이 이뤄지고 박영수 특별검사팀이 초기 수사하는 과정에서 전경련은 청와대와 함께 피고발자에 이름이 올랐다. 일부 진보 성향 시민단체는 2016년 5월 서울중앙지검에 전경련 관계자와 청와대 인사들을 대상으로 고발장을 제출했다. 이후 2017년 초 특검은 청와대 정무수석실 주도로 전경련, 대기업 관계자들이 정기적으로 모여 보수 단체들에 자금을 지원하는 방향을 논의해 왔다고 파악했다. 그런데 2017년 5월 정권이 바뀐 뒤 이어진 검찰 수사에서 전경련은 피해자로 둔갑했다.
전경련 관계자가 수차례 소환조사에서 “청와대의 요청으로 대기업으로부터 자금을 모금해 건넸다”며 “청와대 요구를 거부하는 게 두려워 어쩔 수 없이 들어줬다”는 취지로 당초와 달리 진술을 바꾸면서다.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 등 박근혜 청와대 인사들은 “전경련이 예전부터 지속적으로 하던 시민단체 지원에 대해 청와대 의견을 전달한 것뿐”이라고 주장했으나, 피해자가 명확해지자 직권남용 유죄가 인정됐다.
지난해 10월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으로 구속 기소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사건도 마찬가지다. 임 전 차장이 기소된 8개 죄명 중 핵심은 직권남용이다. 검찰이 그에게 적용한 혐의 대부분은 행정처 기획조정실 심의관이나 일선 법원의 형사수석부장판사 등에게 보고서를 작성토록 해 의무에 없는 일을 하게 했다는 의혹이다. 일부 판사는 당초 검찰에서 피의자 신분으로 입건돼 피의자 진술 조서를 작성한 상태지만, 임 전 차장 공소장에는 직권남용의 피해자로 적시돼 있다.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16일 “직권남용죄가 보호하려는 피해법익은 국가 공무의 공정성으로 일견 국가가 피해자로 보이지만, 또 동시에 범죄 구성요건에서는 특정 피해자를 요구하고 있다”면서 “이 때문에 상명하복 관계에 놓여 있어 위법한 명령이 아닌 이상 따라야 할 의무가 있는 부하직원을 피해자로 봐야 할지, 공범으로 봐야 할지 경계가 모호해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다른 변호사는 “일선 심의관들을 임 전 차장과 공범인 피의자로 만들지, 피해자로 만들지는 순전히 검찰 손에 달려 있다”면서 “명확한 기준이 없다 보니 검찰이 사법처리라는 목줄을 틀어쥐고 있는 형국”이라고 지적했다. 사법부 수사에서는 이와 더불어 내부적 검토보고서만으로 직권남용으로 처벌할 수 있는지가 쟁점이 된다. 임 전 차장 측 변호인은 “구체적 실행행위라면 이미 실행됐으므로 상급자의 직무상 명령이 위법한지 여부에 대한 판단이 가능하지만, 내부적 검토 행위는 설사 과도한 측면이 있더라도 아이디어 차원의 다양한 검토 자체를 위법하다고 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직권남용죄에 미수범 처벌 규정이 없는 이상 검토보고서 작성 자체만을 단죄하기는 어렵다는 지적이다.
김리안 기자 knra@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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