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회평 논설위원

꿈 펼치려고 조국 등지는 현실
첩첩 규제와 反시장 정책 피해
기존 산업도 신산업도 脫한국

투자·두뇌·일자리 다 떠나는
나라에 미래 희망 있을 수 없어
기업하고 싶은 산업정책 펴야


8∼11일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소비자가전쇼(CES) 2019’는 모든 미래 기술의 향연이 펼쳐진 무대였다. 세계를 휘어잡는 글로벌 기업부터 못 가본 길에 겁 없이 도전하는 스타트업에 이르기까지 신산업의 신세계를 열어 보였다. 다양한 현지보도 가운데 유난히 시선이 간 것은 한국인이 꾸렸으되 한국 대표는 아닌 기업들이다.

뇌졸중 등으로 거동이 어려운 사람이 재활 운동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의사의 원격 처방으로 교정받는 제품을 전시한 업체는 한국인 스타트업이다. 그러나 국내에선 원격의료에 해당하는 불법으로 가정용 판매가 안 된다. 결국 미국에 법인을 세우고 CES에 참가했다. 국내 최초로 도심 주행 자율주행차를 만들었던 다른 스타트업은 도로교통법·자동차관리법 등 첩첩 규제에 좌절하고 미 실리콘밸리로 건너가 창업했다. 블록체인 기술로 CES에 명함을 내민 또 다른 스타트업 역시 규제가 덜한 동남아 쪽에 법인을 세울 계획이라고 한다. 모두가 경제적 핍박을 견디지 못하고 조국을 등진 ‘망명자’들이다.

언제부턴가 외국에 나가야 사업의 꿈을 펼칠 수 있는 나라가 돼버렸다. 일명 ‘당뇨폰’은 2004년 벤처기업이 휴대전화 업체와 손잡고 출시한 모델이지만, 바로 생산이 중단됐다. 혈당 체크 기능 탓에 의료기기로 분류됐기 때문이다. 해외에선 잘 팔리는데, 국내엔 15년이 되도록 발도 못 붙이고 있다. 당뇨를 스마트기기 등으로 사전에 관리하면 4조 원 넘게 의료비가 절감된다는 연구도 있다. 2015년 심전도 측정 기능의 스마트워치를 개발하고도 승인을 기다리다 애플에 선수를 뺏긴 사례는 그 판박이다. 한국은 5세대 통신서비스인 5G에서 ‘최초’ 타이틀을 얻었지만, 실속은 없다. 5G는 인공지능(AI), 자율주행차, 원격의료 등과 연계될 때 빛을 발하지만, 국내에선 규제장벽에 막혀 꼼짝 못 한다. SK텔레콤이 굳이 중국으로 가 모바일 헬스케어 사업을 벌이는 이유다. 중국 화웨이는 5G 기술을 활용한 원격수술 솔루션을 개발해 서비스하는 단계까지 갔다.

2017년 기준 해외 신규법인 설립 사례는 3411건이다. 투자액도 해외기업의 국내 진출보다 2배 정도 많은 투자 역조다. 일자리도 43만여 개가 빠져나갔다. 유턴하겠다는 기업은 찾아보기 힘들다. 탈(脫)한국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주로 싼 인건비에 매력을 느낀 기존 제조·서비스업체들의 선택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차량공유, 헬스케어, 핀테크, 바이오 등 신산업 분야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동시다발로 일어나는 일이다.

기업이 나가면 인재도 떠난다. AI는 4차산업 혁명기에 승부를 좌우하는 핵심 기술인데, 특급 인재들은 거의 다 해외로만 간다. 2022년까지 국내 AI 연구인력이 7000명 부족할 거란 보고서도 나왔다. AI는 데이터를 활용하는 경험이 쌓일수록 기술력이 상승하는데,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데이터 규제 속에선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 반면 알리바바·바이두 등 중국 업체들은 세계의 AI 인재들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있다. 중국 AI 인력은 한국의 7배, AI 기업 수는 40배에 이른다. 당장 2, 3년만 지나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식은땀이 난다.

기업도, 자본도, 인재도, 일자리도 빠져나가는 나라에 희망이 있을 리 없다. 코리아 엑소더스를 막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할 텐데, 문재인 정부의 행보는 역주행, 혹은 갈지자다. 최저임금 과속을 보완한다더니, 시행령 개정으로 더 가속페달을 밟았다. 기업 기 살린다며 경영권을 위협하는 상법·공정거래법을 밀어붙인다. 협력이익공유제, 산업안전보건법 등 기업가를 궁지로 모는 규제 추가에 여념이 없다. 노조 리스크는 커져만 간다. ‘혁신성장’ 말만 앞세울 뿐, 가시적 성과는 전무하다시피 하다. 이래서는 한국을 떠나는 경제 망명자만 더 늘어날 뿐이다.

문 대통령은 “산업정책이 없다는 비판이 있다”며 주무 부처를 나무랐다. 하지만 산업정책이 거창할 건 없다. 어느 중견기업이 호소했듯 “기업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수 있도록” 해주면 되는 것이다. 내일부터 규제 샌드박스를 시행한다지만, 승차공유·원격의료·빅데이터 등 골치 아픈 문제는 뒤로 제쳐놨다. 그러니 산업정책은 시민단체가 짠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이다. 외국기업 단체도 ‘갈라파고스 규제 국가’라고 공개 비판한 터다. 새 비즈니스 모델엔 5년 후에야 규제를 도입하는 중국만큼은 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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