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안의 역사 / 전우용 지음 / 푸른역사
‘맞섬’을 악덕으로 가르친 일제
착실·온순함 모범생 문화 강조
일상의 모든것은 진화의 결과
생각·믿음도 역사가 만들어내
생활에서 마주치는 사례 통해
‘나’의 역사적 좌표 확인시켜
전우용의 ‘내 안의 역사’를 읽는 시간은 나 자신에 대한 질문을 누적하는 시간과 같다. 일찍이 아우구스티누스는 ‘나 자신에 대한 문제’에는 좋은 답을 찾을 수 없다고 했다. 나는 나 바깥으로 나갈 수 없기에, 아무리 애써도 자신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의 신’이 돕는다면 어떨까. 나를 둘러싼 일상의 모든 것이 사실은 “수백만 년에 걸친 인류 진화의 결과”이고, 나 자신의 몸과 마음에 대한 생각이나 믿음 또한 본래 그런 것이 아니라 “역사가 만들어 낸 결과”임을 알 수만 있다면, 이를 거꾸로 추적해 ‘나 자신에 대한 앎’을 구축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하여, 여기, ‘나’로 온축된 역사가 나타난다. 마흔세 편 에세이로 이뤄진 450쪽짜리 두툼한 책이지만 하룻밤 사이에 충분히 읽을 수 있다. 사실의 제시와 축적을 통해 말을 거는 역사학자 특유의 서술이 책 전체를 흥미진진한 발견의 도가니로 만들기 때문이다. 한 주제에 예닐곱 쪽에 불과하나, 글들은 모두 한국사, 더 나아가 호모사피엔스의 역사 전체가 압축된 채로 담겨 있다.
뚱뚱함은 오랫동안 부러움의 상징이었다. 노동하는 사람들은 절대로 뚱뚱할 수 없었다. 솟아오른 배는 여유의 증거이고, 넉넉한 얼굴은 후덕의 표현이었다. 19세기 말, 사진이 도입되면서 왕족이나 귀족, 부호나 고관대작의 모습이 신문에 공개됐는데, 하나같이 뚱뚱했다. 누구나 비만해지고 싶어 했고, 양기를 북돋우어 마른 몸을 뚱뚱한 몸으로 비만강장하게 해주겠다는 약들이 쏟아져 나왔다. 1925년쯤부터 ‘우량아 선발대회’가 열렸는데, 무겁고 커다란 아기들이 당당하게 사랑받았다.
하지만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1980년대 말, 서구의 영향을 받아 가치관의 전도가 생긴다. 뚱뚱함은 ‘갑자기’ 사회적 경멸과 도덕적 비난의 대상이 된다. 살찐 몸은 운동하지 않는 게으름의 소산으로, 만병의 근원을 방치하는 타락으로 비난당한다. 뚱뚱한 몸을 날씬한 몸으로 바꾸어주겠다는 ‘몸 만들기’ 열풍이 불어서 고급 헬스클럽 회원권 가격이 집 한 채 값과 맞먹는다. 그야말로 상전벽해, 부자와 빈자의 몸무게가 역사상 처음으로 역전된다.
뚱뚱함과 날씬함, 즉 체형의 역사에서 시작된 저자의 발걸음은 적서차별, 현모양처 같은 가족으로, 회사에 다니고 외식을 하고 보험에 드는 등 먹고사는 일자리로, 권력의 입맛에 따라 수없이 배치를 달리하면서 변신을 거듭해 온 서울 도성 같은 공간으로, ‘몽유도원도’에서처럼 무한한 생명력의 상징이었던 불사의 열매 복숭아가 근대에 들어 한낱 외설의 상징으로 전락하는 것과 같은 문화적 가치관 문제로 확대된다. 짧지만 기나긴 글들이고, 작지만 풍요한 글들이다. ‘나의 삶’을 토대 삼아 역사가 뻗어가고, 역사가 빌미가 돼 앞날의 삶이 성찰되는 역동적 선순환이 반갑다.
“장부가 세상에 처함이여, 그 뜻이 크도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척살하기에 앞서 안중근이 남긴 ‘장부가’의 첫머리다. 자기 집 쌀독보다 천하의 앞날을 먼저 걱정하는 기개와 용기가 뜻 한 글자에 담겨 있다. 사대부 문화는 호연지기를 길러 뜻을 가다듬는 지조 위에 세워졌다. 일제 강점을 용납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일제의 교육은 부정한 권위에 맞서고 부당한 명령에 불복하는 것을 악덕으로 가르쳤다. 온순함과 착실함이라는 모범생 문화가 이로부터 출현했다. “마음이 물러서 남이 시키는 대로 순순히 따르는 것”이 온순함이요, “천하의 대세나 인간의 도리”를 따지지 않고 “실용과 실리에만 집착”하는 것이 착실함이다.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가만히 있으라”는 어른의 명령을 온순히 따른 아이들 수백 명은 이러한 ‘모범생 교육’의 결과로 목숨을 잃었다.
이처럼 우리는 일상에서 흔히 마주치는 예들을 통해 ‘나’의 역사적 좌표를 확인할 수 있다. 저자에 따르면, 오늘의 나를 구성하는 온갖 힘들은 대부분 일제강점기 이후 식민 통치의 결과로 출현했다. 이미 현실이 된 만큼 아주 무시할 수 없지만, 변화를 통해 나타난 것은 또다시 바꿀 수 있음을 역사는 보여주지 않는가. 가까운 과거에 현재의 나를 만든 규칙이 나타났다면, 지금 이 순간 새로운 길로 여행을 시작해 가까운 미래에 또 다른 나와 마주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저자는 적절히 배치된 자료들을 통해 ‘수많은 나’가 정치적으로 더 자유롭고 경제적으로 더 평등하며 문화적으로 더 세련된 세상을 이룩하려고 부단히 힘써 왔음을 솜씨 좋게 보여준다. ‘한 걸음 더’라고 말함으로써 현재의 역사는 비로소 방향성을 가진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걸어갈 길이다. 436쪽, 1만9500원.
장은수 이성과 감성 콘텐츠 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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