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화의 배신 / 리 골드먼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20만년 살아남게 한 몸의 선택
최근 200년 삶의 변화엔 부적응

굶주림·탈수·출혈 막는 유전자
비만·고혈압·뇌졸중 원인으로

살해 당하지 않으려는 경계심
과도한 불안과 우울증 일으켜


비만이 주요 원인인 심혈관 질환은 전 세계 사망 원인 1위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2015년 한 해 심혈관 질환으로 인한 사망자는 1770만 명으로 전 세계 사망자의 31%에 달했다. WHO의 2016 통계에서 세계적으로 6억5000만 명이 비만이었다. 같은 자료에서 3억 명 이상이 우울증을 앓고 있다고 WHO는 추산했다. 인류의 삶의 질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두 요인이 비만과 우울증으로, 최근엔 그 상관관계도 연구되고 있다. 풍요로워졌지만 경쟁이 심해진 현대사회에서, 고열량의 음식을 많이 그리고 짜게 먹고 각종 스트레스에 노출되다 보니 그런 것이겠거니 그 원인을 흔히 추정할 수 있다. 미국 예일대, 하버드대, 컬럼비아대 등지에서 공부하고 강의해온 유명한 심장전문의인 이 책의 저자는 그 원인을 오랜 진화의 결과에서 찾는다. 원인을 다른 각도에서 본다면 해결방식도 달라질 것이다.

인류의 조상인 호모 속(屬)이 출현한 건 230만 년 전, 이후 호모 사피엔스로 20만 년이라는 아득한 세월을 견디고 살아남았다. 지구 상에 출현했던 생물 종 가운데 현재까지 살아남은 비율은 500종당 1종, 0.2%에 불과하니 호모 사피엔스의 진화와 적응력은 대단한 것이다. 그동안의 연구는 뇌가 발달하면서, 즉 영리해져서 인류가 살아남았다고 주로 말한다. 이를 전부 부인하는 건 아니지만, 우리의 생존은 언제나 뇌보다는 몸에 달려 있었으며, 또 근육의 힘보다 타고난 그리고 진화해온 ‘형질들’, 곧 유전자 덕분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 형질들 덕분에 생존전쟁에서 이겼지만, 좋은 것도 지나치면 독이 되듯이, 그 때문에 “적응이란 전투에서 패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산업혁명 이래 지난 200년 사이에 유전자의 진화가 인류의 삶의 변화를 못 따라가면서 문제가 심각해졌다.

장구한 세월 동안 지구에서 인류의 생존을 위협한 가장 큰 문제는 ‘굶주림’ ‘탈수’ ‘폭력’ ‘출혈’이었다. 생존을 위해 인간은 지방을 효율적으로 저장하고, 탈수를 방지하기 위해 소금을 섭취하며, 육체적인 위험에 대해 경계하고, 상처로 인한 혈액 손실을 막기 위해 혈액을 응고시키는 쪽으로 진화해왔다. 구·신석기 시대의 인간은 오랜 추적과 탐색에 의한 사냥이나 채집이 주효한 삶의 방편이었다. 어쩌다 얻은 열량 섭취의 기회를 ‘지방 축적’이라는 유전적 특질로 확보해야 했다. 인간의 몸은 20개가 넘는 분자와 호르몬이 허기와 포만감 조절에 관여하며 배와 허리, 엉덩이에 350억 개의 지방 세포를 집중해 일반적으로 약 13만 칼로리, 비만일 경우 1400억 개, 100만 칼로리의 열량을 비축할 수 있다. 인간의 본능과 인체 내 조절 장치는 전부 과식을 해서라도 당장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양을 흡수하는 쪽으로 지나치게 프로그래밍된 것이다. 당연히 살찌기보다 살 빼기가 힘들게 돼 있다. 체중이 감소할 경우 우리 몸에서는 입맛을 돋우는 최소 일곱 가지의 호르몬과 분자의 분비가 상승해 몇 년간 지속된다. 살 빼기에 실패하고 ‘요요 현상’을 겪는 것은 개인의 의지가 아니라 유전자의 탓이 큰 것이다.

채집과 긴 추적의 사냥을 해온 인류에게 지구력을 확보할 수 있게 하는 건 열량과 함께 물이었다. 탈수를 방어할 수 있고 그 욕구를 즉시 알려주는 미네랄 중 가장 중요한 건 소금이었다. 인간의 유전자는 소금이 필요하지 않을 때도 입맛과 생존을 위한 과잉보호 본능 때문에 짠 음식을 먹고 싶은 강력한 탈수 방어기제를 만들어 냈다. 우리 조상들은 하루에 0.7g의 나트륨만 섭취하고도 잘 살았지만, 지금은 세계적으로 평균 5g을 섭취한다. 나트륨 보존 호르몬이 과다 분비돼 고혈압의 95%를 차지하는 ‘본태성 고혈압’이 발생한다.

또 선사시대에서 살인은 동물의 공격이나 사고보다 흔했다. 살인을 통해 식량과 물, 자손 번식 가능성을 더 수월하게 확보할 수 있었다. 생존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극도로 경계하고 두려워하면서 불안해하거나 순종적인 태도를 취하고 우울해지는 것이 주효했다. 필요 이상의 두려움인 불안, 슬픔과 우울은 진화가 낳은 탁월한 자기 방어법이었다. 현대에도 사라지지 않은 우리 유전자의 살해당하지 않으려는 방어기제가 불안과 우울증을 유발해 원래 피하려 했던 폭력 자체보다 더 많은 희생자를 내고 있다.

또 하나, 선사시대 인류에게 출혈은 곧 죽음이었다. 부상이나 출산 시 출혈이 멈추지 않으면 생존할 방도가 없었다. 출혈로 목숨을 잃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 우리 몸의 혈소판은 혈관 안쪽 세포 방어벽에 손상이 생기면 재빨리 가서 구멍을 막든지, 혈액 응고 단백질이 연쇄 반응을 일으켜 일종의 섬유 그물망으로 상처를 때우는 혈액 응고 경로를 갖췄다. 인류의 생존을 위협한 가장 큰 문제를 막으려는 몸의 진화가 바로 비만과 고혈압, 우울증·불안, 심장마비 및 뇌졸중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게 거대한 아이러니다.

현대 의학자인 저자는 역시 주로 최첨단 현대 의료에서 해결책을 모색한다. 다이어트나 운동, 소금 섭취 줄이기, 심리 치료, 공공 프로그램 등으로 일정한 효과를 거둘 순 있지만 그 한계도 있다. 오랜 유전자의 적응을 후천적 학습으로 쉽게 해결할 순 없을 것이다. 현대 과학과 의학, 곧 유전자 시술이나 약과 수술 등의 가능성을 크게 본다. 그렇다고 이를 맹신하거나 남용하는 것에 대해선 선을 긋지만, “인류가 가진 뛰어난 뇌를 십분 활용해 20만 년에 걸쳐 살아남은 어려움을 생각해 보면, 충분히 승산이 있는 싸움”이라고 강조한다. 560쪽, 2만2000원.

엄주엽 선임기자 ejyeob@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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