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1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화우공익재단 집무실에서  박영립 이사장이 공익소송 자료를 검토하고 있다.
지난 21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화우공익재단 집무실에서 박영립 이사장이 공익소송 자료를 검토하고 있다.

- 박영립 화우공익재단 이사장

2003년부터 한센인소송 맡아
정착촌 찾아다니며 피해 수집
日상대로 수백명 보상 얻어내

성매매 여성 무료변론도 시작
포주가 준 선급금 무효 이끌어

저소득층 위해 연탄 배달하고
매달 미혼모·장애인시설 봉사

“가난했던 어린 시절 주경야독
주변 도움 덕에 오늘의 나 존재
이젠 사회공헌하는 게 내天命”


공자는 논어 ‘위정편’에서 나이 쉰을 지천명(知天命)이라고 했다. 50세에 이르면 하늘의 뜻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박영립(66·사법연수원 13기) 변호사도 쉰 살이 되던 2003년 깨달았던 ‘하늘의 뜻’이 있다. 사회적 약자를 위해 봉사하라는 천명이었다. 잘나가던 변호사에서 공익재단 이사장으로 사회 공헌 활동과 공익 소송에 매진하고 있는 이유다. 박 이사장을 지난 21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화우공익재단 집무실에서 만났다.

그는 법조계에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어려운 집안 형편 탓에 전남 담양군에서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단돈 1000원을 손에 쥔 채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상경 후 시장 점원, 양복 기능공, 여관 심부름꾼, 공사장 인부 등 안 해본 일이 없다. 1974년 스물한 살이 되던 해 가까스로 검정고시로 중·고교 과정을 마치고 숭실대 법경대학을 수석 합격했다. 그는 주위의 거센 반대와 비아냥을 무릅쓰고 사법시험에 도전해 스물여덟 살에 합격(23회)의 영광을 안았다. 늦은 나이에 변호사가 된 만큼 앞만 보고 달려 국내 굴지의 법무법인 화우의 대표 변호사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다.

“검정고시를 준비하면서 일하던 서울 동대문시장 이불가게 사장에게 양해를 구해 오전에는 학원을, 오후에는 가게에서 일했어요. 학원에서 잡일을 한 대가로 장학금도 받았고요. 동대문시장의 가게주인이 검정고시 학원에 다닐 수 있도록 배려주지 않았거나 학원에서 장학금을 지원해주지 않았다면 대학입학도, 사법시험 합격도 불가능했을 겁니다. 오늘의 제가 있기까지 주변의 도움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부채의식은 늘 가지고 있었습니다.”

박 이사장은 쉰 살이 되던 해인 2003년 대한변호사협회 인권 이사를 맡으면서 공익소송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박 이사장은 전국 각지에서 60여 명의 변호인을 모아 2004년 8월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록도 한센인 피해자를 위한 보상금 청구 소송을 냈다. 일제강점기인 1916년부터 1945년 해방 전까지 일제는 우리나라 한센병 환자 수천 명을 소록도에 격리해 강제 노역을 시키고 생체 실험까지 했다. 이듬해 일본 도쿄(東京)지방재판소는 이를 기각했지만, 박 이사장 등은 수시로 일본을 직접 찾아 일본 정부와 국회를 상대로 한국 한센인에 대한 피해 보상 운동을 했다.

일본 국회는 2006년 2월 일제에 피해를 본 한국·대만 한센병 환자들에 대해 보상금을 주도록 법을 개정했다. 2006년 2월 처음으로 한센병 피해자 2명에 대한 보상이 인정된 것을 시작으로 2017년 2월까지 한센병 피해자들 590명에 대한 일본 정부의 피해보상책임(피해자 1인당 800만 엔)이 인정됐다.

박영립 이사장이 서울 강남구 구룡마을에서 연탄봉사를 하고 있는 모습.  화우공익재단 제공
박영립 이사장이 서울 강남구 구룡마을에서 연탄봉사를 하고 있는 모습. 화우공익재단 제공

박 변호사는 한센인 소송을 하면서 전국 정착촌을 직접 찾아다녔다. 처음에 정착촌 방문을 결정하고는 망설였던 것도 사실이다. 당시만 해도 한센병의 전염성이 매우 높다고 잘못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박 변호사는 피해 상황을 더욱 정확하게 수집하기 위해서는 현장을 직접 찾아가 보고 얘기를 듣는 게 필요하다고 판단해 주변의 만류를 뿌리쳤다. 한센인 정착촌을 돌며 설명회를 열고 한센인들을 일일이 찾아 진술서를 작성했다. 일제 당시 한센인 정착촌에 강제 억류됐다는 증거를 찾기 위해 소록도에 있는 7개 교회의 교적부, 학교 졸업생 명부 등 관련 자료를 모두 뒤졌다. 그렇게 열심히 소송을 준비하면서도 승소에 대한 자신은 없었다.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과거사 소송 중 한 가지도 해결된 게 없었기 때문에 승소를 자신할 수 없었습니다. 한센인 문제는 한·일 과거사 문제 중 유일하게 해결된 사례입니다. 강제징용, 위안부 문제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잖아요.”

이 과정에서 박 이사장은 해방 이후 우리 정부도 한센인들에게 낙태 및 강제 정관 수술 등을 하며 인권 침해를 했던 사실을 알게 됐다. 일제강점기 때 시행됐던 강제 단종 및 낙태 정책은 잠시 중단됐다가 광복 후 1949년부터 1992년까지 이어졌다. ‘씨를 말리겠다’며 국가가 시행한 단종수술의 피해자는 1800여 명. 2007년 일본에 이어 한국 정부도 한센인 피해자지원법을 만들었지만 지급되는 생활지원금은 월 15만 원뿐이었다. 박 이사장은 2011년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내 승소했다. 현재까지 530명이 손해배상을 받았다. 단종수술을 받은 피해자들에게는 3000만 원씩, 낙태수술 피해자에게는 4000만 원씩의 배상금이 인정됐다.

“대한변협 인권이사로 재직하던 시절 처음 한센인과 인연을 맺었어요. 일본 변호사들이 자국 정부가 과거 한센인의 인권을 침해한 것에 대해 대만과 한국 변호사들이 공동으로 대응하자며 찾아왔습니다. 일본에서는 피해자들을 구제할 수 있는 법이 만들어져 강제 격리한 한센인에 대한 보상이 이뤄졌다는 것을 알려주더라고요. 우리나라 소록도를 비롯해 90개 상당의 한센인 정착촌에 같은 처지의 피해자들이 있다는 것도 그때야 알게 됐습니다. 대한변협이 권위주의 시절에 민주화와 사회적 소수자의 권익 보호를 위해 힘써왔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한센인들의 피해 상황을 일본 변호사들이 알려주기 전에 미리 알지 못했던 점이 부끄러웠습니다.”

이후 박 변호사는 다른 현안에도 외연을 넓혀 본격적으로 공익 소송에 매진하게 됐다. 성매매 피해 여성들을 위한 선급금 무효확인 소송을 통해 인권 사각지대에 놓인 성매매 여성들도 도왔다.

“성매매 피해 여성을 무료로 변론하면서 여성들에게 선급금이 가장 무거운 족쇄라는 것을 듣게 됐어요. 포주들이 상당한 금액을 피해 여성에게 빌려주면서 갚을 때까지 일을 시키는 ‘노예 계약’ 형태로 성매매 여성을 압박하고 있었습니다. 선급금 지급에 사채업자 등이 개입하면 여성들은 더욱 나오기 힘든 수렁에 빠지게 됩니다. 피해 여성들이 신분 노출을 꺼리는 탓에 소수의 성매매 여성들만 소송에 참여해 승소했습니다.”

그가 성매매 여성 공익 소송에 참여한 것도 어려웠던 시절의 기억 때문이다. 박 이사장은 전남 담양에서 상경한 직후 친척의 소개로 서울역 인근 여관에서 일했다. 그곳이 당시 ‘양동’이라 불리던 유명한 사창가라는 사실은 한참 뒤에야 알았다. 거기서 온갖 인간 군상들을 보고 성매매 여성들이 얼마나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는지도 알게 됐다. 그때의 경험이 피해 여성들을 위한 무료 법률 상담과 소송 지원으로 이어지게 한 원동력이다.

박 이사장은 2014년부터는 화우공익재단에서 약자들을 후원하는 일에 더욱 정성을 쏟고 있다. 지난해에는 동료 변호사들과 서울 강남구 구룡마을 12개 가구에 연탄 2400장을 나눠줬다. 미혼모, 장애인 시설 등에서 매월 정기 봉사활동도 한다.

“남들은 흔한 연탄봉사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저한테는 남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아직도 겨울만 되면 어린 시절 추운 새벽 온기가 남은 연탄재를 껴안고 잠들던 어린 날이 어제처럼 생생합니다. 그때의 경험 때문인지 성인이 된 후에도 연탄재 쓰레기더미를 함부로 발로 차지 못하겠더라고요. 안도현 시인이 ‘너에게 묻는다’는 시에서 연탄재의 온기를 말했는데 실제로 직접 경험해봤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12월에는 노숙인 지원 단체인 ‘달팽이 소원’과 함께 ‘달팽이 음악제’를 열었다. 달팽이 소원은 노숙인이 문화, 예술, 취미활동을 할 수 있도록 돕는 단체다. 다양한 활동을 통해 노숙인들이 자존감을 높이고 이웃과 소통하면서 자립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박 이사장은 음악제를 통해 노숙인들의 자립을 응원하려는 취지로 달팽이 소원에 대한 후원을 결정했다.

“노숙인들은 정부 지원금을 받아도 어떻게 서야 할지 몰라 다시 노숙인의 삶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음악을 하면서 타인과 소통하고, 삶의 의지를 다시 불태우게 된다는 것을 듣게 됐습니다. 재단 차원에서 노숙인들의 밴드와 합창부 활동을 돕고 있습니다. 과거 노숙인 법률 상담을 해오던 변호사들이 음악제 후원에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박 이사장은 지난해부터는 해외의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공익 소송에도 관심을 두고 있다. 변호사단체들과 함께 지난해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평화법정’도 열었다. 1968년 베트남 꽝남 성에서 있었던 퐁니·퐁넛 마을 학살 사건의 생존자와 하미 마을 학살 사건의 생존자를 원고로, 대한민국 정부를 피고로 해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해 저질러진 민간인 학살의 책임을 묻는 법정이었다. 당시 주심을 맡은 김영란 전 대법관은 “중대한 인권침해이자 전쟁범죄의 성격을 띠는 사건”이라며 한국 정부에 책임이 있음을 선고했다.

박 이사장은 사회 공헌 활동과 공익 소송에 매진하는 이유에 대해 “한센병과 성매매 여성들을 위한 소송 등은 사회적 약자들에게 도움을 주며 살아야겠다는 생각 때문에 시작한 일”이라며 “내가 그들을 도울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 다행이고 소송 결과도 좋아 늘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박 이사장은 앞으로도 사회공헌활동을 통해 인생의 활력을 찾을 생각이다. 그는 “우리 사회가 공생하기 위해서는 비주류에 대한 사회적인 냉대와 무관심을 극복해야 한다는 점을 남들보다 일찍 깨달았다”며 “사회 구성원들끼리 잘 얽히고설켜 우리 사회가 선순환될 수 있도록 이바지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정유진 기자 yoojin@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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