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사는 피부

영화사(映畵史)의 각 시대를 빛냈던 몇몇 거장 중에서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만큼 밀도가 강한 작품들을 내놓았던 예술가가 있을까. 그의 작품에는 에너지와 색(色)이 넘친다. 영화 속 캐릭터들은 히스테리컬하고 분열적이며 괴기스럽다. 그의 인물들 대부분이 이중적, 혹은 다중적 자아를 가지고 있고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결정을 하거나 행위를 보이기 때문이다. 알모도바르 감독의 다중적 캐릭터는 아마도 다층적인 면을 소유한 하나의 고유한 인물을 고안하는 식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 인간의 보편적인 모순이나 역설을 하나의 상징적인 인물로 만들어 내는 방법으로 창조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칸과 아카데미를 포함한 수많은 영화제와 시상식에서 알모도바르 영화의 그러한 기괴함, 혹은 그 기괴함 저변의 근원적 보편성을 인지하고 찬양했다. 알모도바르 감독의 2011년 연출작 ‘내가 사는 피부’(사진) 역시 칸국제영화제와 골든글로브 시상식을 포함한 유수의 영화 행사에서 총 66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됐고, 28개 부문에서 수상하는 기록적인 쾌거를 이뤘다.

이 영화는 성형외과 의사 로버트(안토니오 반데라스)의 일상으로 시작된다. 그는 호화로운 저택에서 자신의 클리닉까지 운영하고 있는 성공한 의사다. 로버트는 비밀리에 인간을 대상으로 피부이식 실험을 진행하고 있는데 이 실험에 강제로 동원된 베라(엘레나 아나야)는 감금된 상태다. 베라는 완벽한 피부와 얼굴을 가진 여성이고, 갇힌 방에서는 늘 피부 고정에 필요한 보디슈트를 입고 있다. 영화의 초반부가 지날 때까지 어디서 어떻게 왜 베라가 납치됐고, 감금됐는지 설명되지 않는다. 집 안의 비밀이 유지되게끔 돕는 로버트의 조력자이자 어린 시절 유모 마릴리아(마리사 파레데스)의 배경 역시 언급되지 않는다.

김효정 영화평론가
김효정 영화평론가
눈앞의 미스터리를 푸는 대신 영화의 초반부는 과거 로버트에게 일어났던 비극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의 아내는 자동차 폭발 사고를 당했고, 화상으로 무너져내린 자신의 얼굴을 보고 자살했다. 그의 딸 역시 엄마의 사고로 우울증을 앓다가 우연히 가게 된 파티에서 강간을 당한 후 투신자살하고 만다. 로버트의 과거사를 퍼즐 조각처럼 보여주고는 영화는 다시 현재로 돌아온다. 서서히 자신의 실험 대상인 베라에게 빠져드는 로버트에게 마릴리아는 반드시 대가를 치를 것이라며 경고한다. “베라가 그녀와 너무 닮았다”는 말을 덧붙이며.

영화의 중반부가 지나야 베라와 로버트의 관계에 대한 실마리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사실상 베라는 ‘빈센테’라고 불리던 남자였으며 로버트의 딸을 강간해 자살로 이르게 했던 청년이다. 이에 대한 응징으로 로버트는 빈센트를 납치, 성전환 수술을 해 여자로 만든다. 또한 죽은 부인과 똑같은 외모로 성형해 자신이 진행 중인 동물 피부이식 실험 대상으로 ‘사육’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꼬리에 꼬리를 무는 형국의 이 비극이 드러내는 더 큰 비극의 본체는 사랑이다. 로버트가 아내의 외모를 가지고 있는 베라에게 사랑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로버트는 감시 카메라로만 지켜보던 베라의 방으로 들어가 자신이 만든 베라의 피부와 성기를 만지고 애무한다. 극렬히 거부하던 베라도 서서히 저항을 멈추고 로버트를 끌어안는다. 로버트가 보내준 화장품과 옷을 던져버렸던 베라는 점차 그를 위한 여자가 돼간다. 하지만 로버트가 베라를 향한 의심의 끈을 놓아버린 순간 베라는 로버트의 총으로 그와 마릴리아를 죽이고 달아난다. 6년 만에 자유의 몸이 된 베라가 처음으로 시선을 두는 것은 어머니가 운영하는 옷가게에 전시된 붉은 드레스다. 강렬하고 고혹적인 붉은 드레스를 한동안 응시한 후 그는 어머니와 재회한다.

어쩌면 영화의 결말은 충격적인 사건들이 빼곡히 채워진 본론보다 더 강렬하다. 로버트가 딸의 죽음만큼이나 가혹한 형벌을 준 대상에게 끝내는 사랑을 품고, 여자가 된 자신의 몸을 증오하던 베라가 탈출하자마자 마음을 뺏기는 것이 여성의 드레스라는 역설은 한 치 사이로 전복하는 인간 희비극의 위태롭고 피상적인 종말을 경고하기도 한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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