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우 이순재의 설맞이
주위에선 좀 쉬라고 하지만
곧 영원히 쉴 때가 다가오는데
열심히 해서 잘 마무리해야죠
뭐 하나 더 먹겠다고 덤비다 보면
오히려 더 큰 손해를 보게 되죠
선의의 경쟁하는 기풍이 필요해요
“행복의 시작은 가정이에요. 일하러 가기 전에 함께 아침 먹는 시간과 저녁에 들어와서 가족을 만나는 시간이 즐거워야 행복할 수 있어요.”
팔순을 넘어서도 화목한 가정을 꾸리며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배우 이순재(85)는 행복의 조건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그는 설을 맞아 진행한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대개 자신의 인생 목표에 도달하면 행복할 거라 생각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라며 “행복은 일상에서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회적으로 성공해도 부부간에 불화가 있고, 자식들이 속을 썩이면 행복할 수 없어요. 외형은 멋지지만 내부로 들어가면 엉망인 가정이 많아요. 몇 번 결혼식 주례를 서며 ‘행복을 먼 데서 찾지 말고, 오늘 하루의 행복에 유념하라’는 말을 해줬어요. 아무리 죽기 살기로 사랑해도 살다 보면 사랑은 환상이 되죠. 결혼은 현실이니까요. 최소한의 경제적 조건도 필요하지만 그건 큰 게 아니에요. 서로 의견이 달라도 극복하고, 안아주며 사는 게 중요해요. 사실 신혼 초에 우리 부부는 행복할 수 없었어요. 한 달에 3주를 밖에서 보내며 촬영해야 했어요. 하루에 영화 4편을 찍은 적도 있고요. 집에 들어가면 자기 바빠서 아이들이 나에 대한 기억이 없어요. 아내와도 많이 싸웠고요. 그땐 ‘나 혼자 잘 살려고 그런 게 아니고 너희들을 위해 뛴 것’이라고 말해도 가족들은 내 입장을 이해 못 했죠. 이젠 경륜이 쌓여서 가족의 마음을 잘 이해해요.”
“새해를 맞은 소감”을 묻는 질문에 그는 “이젠 해가 바뀌어도 새롭지 않다”고 답했다.
“그냥 해오던 일을 계속하는 거죠. 내 생일도 잘 기억 못 해서 아내가 알려줘야 알아요. 환갑, 진갑 다 그냥 지나갔어요. 자식들도 다 커서 50대가 됐으니 손주들이 건강하게 원하는 바를 이루길 바라는 마음이에요. 남에게 피해 안 주고 잘살다가 어떻게 편하게 가느냐, 그것밖에 안 남았어요. 주위에선 좀 쉬라고 하지만 곧 영원히 쉴 때가 다가오는데 열심히 해서 잘 마무리해야죠(웃음).”
연극 ‘그대를 사랑합니다’를 공연 중인 그는 이달 초에 방영될 JTBC 드라마 ‘리갈하이’에도 출연한다. 또 3월에는 연극 ‘앙리할아버지와 나’로 무대에 오른다.
“‘그대를 사랑합니다’는 원래 연극으로 시작해 영화로 만든 거예요. 영화는 늙은이들만 나와서 일찍 내릴 줄 알았는데 추창민 감독이 잘 만들어서 성공했죠. 케이블 방송에서 드라마로도 방영됐고, 형식을 조금 바꿔 연극으로 다시 올렸어요. 내가 계속 우유 배달하는 김만석 역을 맡으니까 특별한 애착이 있냐고 묻는데, 배우는 모든 작품에 애정이 있고 의지를 갖고 하는 거죠. 작년부터 공연한 ‘장수상회’ ‘사랑해요 당신’ ‘그대를 사랑합니다’와 올해 할 ‘앙리할아버지와 나’ 모두 치매를 소재로 한 작품이에요. 나이 먹으니까 그런 역할이 주로 들어와요. 물론 배우는 어떤 역할이든 그 역할에 맞게 하면 되는 거예요. 문제는 우리 나이가 되면 대사가 많은 주연을 맡기가 쉽지 않아요. ‘그대를 사랑합니다’에서는 300마디 이상 대사를 해야 하고, ‘앙리할아버지와 나’는 대사량이 400마디 정도 되거든요. 나는 아직 할만 하지만 대사량이 부담스러워서 피하는 배우도 많아요. ‘리갈하이’는 코믹 법조물인데 내가 맡은 법률사무소 사무장 구세중이 지금까지 촬영분에서는 젊은 법조인들 심부름을 하지만 앞으로 뭔가 있겠죠. 그거 시키려고 나를 캐스팅하진 않았을 테니까요. 영화나 드라마, 연극에서 어떤 역할이든 제대로 하려고 노력하죠.”
그가 활동영역을 확대하며 지치지 않고 꾸준히 연기할 수 있는 동력은 무엇일까.
“좋게 말하면 의욕이죠. 젊은 시절부터 연기자라는 직업에 철저하게 훈련이 돼 있어서 지금도 힘들지 않아요. 과거 가난했던 시대엔 드라마, 영화 가리지 않고 이것저것 계속해야 해서 매일 밤을 새우며 일했어요. 시간 나면 연극 무대에도 올랐고요. 그때 습성이 몸에 배서 지금도 너끈하게 밤새워 일해요. 또 더 해보고 싶다는 의지도 중요한 동력이에요. 이왕 할 거면 책임감 있게 제대로 하고 싶다는 의지가 계속 솟아나요.”
지난해 10월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시상식에서 은관문화훈장을 받은 그는 “그동안 상복이 없었다”고 말했다.
“1956년부터 연극 무대에 올랐는데 연극계 상을 한 번도 못 받았어요. 1970년대 이후 TV 드라마에 집중했더니 탤런트는 연극배우로 인정하지 않고, 장사꾼으로 보더라고요. 이낙훈, 김성옥, 김동훈 등 동료들은 다 받았는데 나만 못 받았죠. 1965년부터 영화도 시작해서 1980년대 중반까지 100여 편을 찍었는데 영화배우협회에서 탤런트를 배제해 대종상을 못 받았어요. 그게 미안했던지 나중에 새마을 관련 영화로 특별 남우주연상을 주더라고요. 아마 ‘특별’ 자가 들어가는 상은 나만 받았을 거예요(웃음). 2012년에 보관문화훈장을 받았고, 그 이후에도 서훈 제의가 있었지만 다른 사람 주라고 했어요. 그러다가 생각지도 않은 은관도 받게 됐어요. 영광이죠.”
그에게 “올해 어떤 바람이 있느냐”고 말을 건네자 개인적인 바람과 사회적인 바람을 나눠 말했다.
“2년 정도 드라마를 많이 못 해서 올해는 드라마에 집중하려고 해요. 영화도 한두 편 준비 중이고요. 작년 여름에 정영숙 씨와 함께 찍은 ‘로망’이 3, 4월쯤 개봉할 거예요. 노부부의 사랑과 소통을 그린 영화인데 돈과는 상관없는 저예산 영화예요. 그래도 우리 나이에 주인공 맡기가 쉽지 않죠. 우리 사회는 올해가 어려운 시기예요. 잘 극복해야죠. 남북문제와 안보가 국민이 안심할 수 있는 방향으로 진행됐으면 해요. 또 국민화합 분위기가 조성됐으면 하는 바람도 있어요. 가천대 석좌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이젠 이념적 갈등이 있을 수 없고, 민주화도 다 됐으니 미래를 향해 뛰라고 말해요. 지역갈등도 앞세대가 만든 현상이니 전염되지 말라 하고요. 앞으로는 쓸데없는 일로 갈등하지 말라고도 해요. 우리 민족은 930번의 외침에도 말살되지 않고 버텨낸 저력이 있어요. 그 대단한 저력을 살려야죠. 그러려면 배려하는 마음이 필요해요. 뭐 하나 더 먹겠다고 덤비다 보면 오히려 더 큰 손해를 보게 되죠. 각자 도덕성을 바탕으로 자신이 맡은 일을 충실히 하면서 선의의 경쟁을 하는 사회적 기풍이 필요해요.”
김구철 기자 kckim@, 사진 = 김선규 기자 ufoki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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