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인권 ‘걱정 말아요 그대’
설 연휴를 고난주간으로 보낸 취업준비생에게 위로를 전한다. 친척들 모인 자리에 본인 부재 상황에서 “누구는 어디 취직했다는데 걘 언제 취업할 거냐?” 묻는 곤혹스러운 상황이 가슴 한쪽을 짓눌렀을 거다. 좋은 의도로 물은 거라며 스스로 센스 없음을 자복하지 말자. 상 받은 자 옆엔 상처받은 자 있다는 걸 명심하자. 보는 사람에겐 계절의 정취지만 꽃의 입장은 다르다. ‘그리움에 지쳐서/울다 지쳐서/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소’(이미자 ‘동백아가씨’ 중).
당사자 아니면 감을 잡을 수 없는 이해충돌현장(利害가 아니라 理解)은 곳곳에 있다. 자주 인용되는 안도현의 시.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지금부턴 실화다. 연탄재를 발로 차는 친구에게 이 시를 들려줬더니 예상 못 한 답변을 한다. “날 키워주신 조부모가 두 분 다 연탄가스로 돌아가셨거든.” 한 방 맞은 느낌이었다. 이 시의 제목은 ‘너에게 묻는다’인데 우리는 묻지도 않은 채 예상하고 단정 짓고 비난하는 일에 점점 익숙해 간다.
우리말 ‘묻다’는 앞에 어떤 말이 오느냐에 따라 모양이 달라진다. 정답을 묻다, 손때가 묻다, 책임을 묻다, 유골을 묻다. ‘그대 가슴에 얼굴을 묻고/오늘은 울고 싶어라’(김수희 ‘애모’ 중). 그런데 땅에 묻기도, 가슴에 묻기도 어려운 게 있다. ‘어둡고 괴로웠던 세월도 흘러/끝없는 대지 위에 꽃이 피었네’(나애심 ‘과거를 묻지 마세요’ 중).
길을 묻는 젊은이에게 다음 노래를 불러주면 그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여기서 끝낼 수는 없잖아/(중략) 너무 힘들고 외로워도/그건 연습일 뿐야(황규영의 ‘나는 문제 없어’ 중). 십중팔구 젊은이를 다시 만날 가능성이 옅어질 거다. 희망이란 단어가 고문으로 대체된 걸 그는 몰랐다. 모른다고 용서해주지도 않는다.
취직 못 한 아들과 퇴직한 아버지 사이에 침묵이 흐른다. 정년퇴직에는 무서운 글자 두 개가 공존한다. 정지하는 것(停)과 퇴장하는 것(退). 학교 다닐 때 우린 정학이 두려웠고 퇴학이 무서웠다. 정년퇴직은 인생학교에서 정학당하고 퇴학당하는 건가. 이제부터 퇴물이 되는 것 아닐까. 선배세대에선 취업보다 승진에 관심이 컸다. ‘사람 없어 비워 둔/의자는 없더라/(중략) 억울하면 출세하라/출세를 하라’(김용만 ‘회전의자’ 중). 인생의 망루에서 무엇을 보느냐가 중요하다. 별을 보려는 자는 밤을 기다려야 한다. 희망과 절망은 각자가 붙인 별의 이름이다. 그들은 쓰는 언어가 다르고 오는 미래가 다르다.
이태리타월 위에 이런 글자를 새겨 넣은 걸 보았다. ‘다 때가 있다’ 몸에도 때(垢)가 있고 삶에도 때(時)가 있다는 걸 이처럼 명시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은 변하고, 변하고, 변한다.(To everything, turn, turn, turn)/일으킬 때가 있고 무너질 때가 있다(A time to build up, a time to break down)/심을 때가 있고 거둘 때가 있다(A time to plant, a time to reap)’(더 버즈의 ‘턴, 턴, 턴’ 중). 분명한 건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것이다. 귀농한 친구는 때마다 농작물을 보낸다. 그 친구의 겨울이 행복한 데는 이유가 있다. ‘봄이면 씨앗 뿌려/여름이면 꽃이 피네/가을이면 풍년 되어/겨울이면 행복하네’(남진 ‘님과 함께’ 중).
아주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노래채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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