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恨으로 이어져 온 평생의 아픔
진솔한 대화 그림일기에 담아
인생의 굽이굽이를 아주 오래 지나서야 글과 그림을 배운 20명의 순천 할머니의 아름다운 그림일기이다. ‘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라는 제목처럼, 이제야 글을 배운 할머니들의 그림일기엔 인생과 자기 이야기가 가득하다. 오랫동안 바라다 뒤늦게 배운 글이어서인지, 글을 통해 자신을 표현한다는 기쁨이 얼마나 큰지를 누구보다 생생하게 느꼈기 때문인지 할머니들의 그림일기는 놀라울 정도로 숨김없이 솔직하다.
“산골에서 어렵게 살다 보니 늘 배가 고팠습니다. 내 또래 얘들이 학교 가면 부러웠습니다. 나는 학교 갈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가수가 되고 싶었습니다. 공부를 안 해서 포기했습니다. 앞으로 내 꿈은 초등학교 졸업장을 받는 것입니다. 중학교 공부도 해보고 싶습니다.”
공부를 하고 싶었던 어린 시절 이야기는 많은 할머니의 그림일기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단골 이야기다. 그리고 술과 노름과 여자로 돈을 모두 날린 아버지, 살림이 어렵다며 아홉 살에 자신을 국밥집에 보낸 어머니에 대한 원망, 이루지 못한 꿈과 손 한 번 잡히고 해야 했던 원치 않은 결혼, 고주망태 남편, 까다로운 시어머니와 시누이…. 그 시절을 지나온 한국 여성들의 고난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한국 사회가, 우리가 이렇게 지독한 시간을 지나왔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한다. 아이들처럼 천진하게 쓰고 그렸지만 그 안에는 모두가 공유해야 할 지난 기록이 담겨 있다.
그래도 이제는 책을 읽고, 이름과 주소를 쓰고, 버스 노선도를 보고, 은행에 가서 번호표를 뽑고, 자기 통장을 만들게 되면서 할머니들이 느끼는 기쁨은 마음 한구석에서 눈물을 훔치던 독자들에게도 위로를 건넨다. 꾸밈없이 담담하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갖는 특유의 힘이 있고, 그러면서도 인생의 희로애락을 몸소 넘은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는 유머와 웃음이 있다. 네모, 세모, 동그라미부터 배운 그림은 아이들 그림처럼 꾸밈없는데, 색감이 밝고 환해서 보는 사람들의 기분을 좋아지게 한다.
젊은 분은 50대, 많으면 90대를 바라보는 할머니들은 이미 유명해진 분들이다.
할머니들은 2016년부터 순천시 평생 학습관에서 한글을 공부해 올해 3년 차 초등과정을 마쳤고, 그 사이 순천시립 그림책 도서관에서 김중석 그림책 작가에게 그림을 배웠다.
그러다 지난해 할머니들의 그림일기가 김 작가의 페이스북에 공개되면서 자유롭고 개성 넘치는 그림, 담담하지만 가슴을 울리는 글이 많은 이에게 찬사를 받았다. 결국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할머니들의 그림은 서울에서 전시회를 했으니 책 밖의 이야기는 책 안의 이야기만큼 따뜻하다.
이 책뿐 아니라 요즘 뒤늦게 글을 배워 시를 쓴 할머니들의 영화가 개봉되고, 뒤늦게 그림을 배운 할머니의 그림책이 나와 화제가 되기도 했다. 고령화 시대의 새로운 풍경인데, 잊힐 뻔한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우리 모두 들을 수 있어 참, 다행이다. 192쪽, 1만8000원.
최현미 기자 ch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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