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윤일 석학연구원이 지난달 29일 서울 서대문구 카페 충정각에서 창밖을 내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다.  김선규 기자
장윤일 석학연구원이 지난달 29일 서울 서대문구 카페 충정각에서 창밖을 내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다. 김선규 기자
차세대 고속로 등 ‘韓원자력 개척자’

한국인 최초의 로런스상 수상자 장윤일 미국 아르곤국립연구소 석학연구원은 우리나라에 원자력공학이 도입된 초창기에 이 학문을 선택, 미국에 건너가 세계 최고의 연구소에서 뿌리를 내린 원자력 학계의 개척자다.

장 석학연구원은 평북 의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병원을 개업하고 있는 의사였는데, 장 석학연구원이 5세 때 ‘공산당에서 병원을 부수려고 찾아올 것’이라는 귀띔을 듣고 가족이 함께 도피했다. 구파발 쪽에 정착했는데, 6·25전쟁 발발로 피란 생활이 시작됐다. 게다가 그의 아버지가 공군 군의관으로 입대한 탓에 더욱 자주 옮겨 다녀야 했다. 장 석학연구원은 “초등학교는 다섯 군데, 중학교는 세 군데를 다녔다”고 말했다.

그 와중에도 공부는 잘해서, 한 번에 서울대 원자력공학과 60학번으로 입학했다. 그는 “고등학교 때부터 과학, 수학을 제일 좋아했다”며 “부모님은 아버지를 따라 의사가 되라고 했지만, 저는 의대는 생각이 없고 공대에 가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가 대학에 들어갈 때는 한창 한국에 원자력공학이 전해지던 시기였다. 장 석학연구원이 원자력공학과 2회 졸업생이다. 1959년에 원자력공학과가 처음 생겼다. 원자력연구소(현 한국원자력연구원)가 설립된 것도 1959년이다.

장 석학연구원은 “새로 생기는 학과여서 기대도 컸고, 재미있을 것 같아 선택했다”며 “그런데 1964년에 졸업하고 나니 취직할 데가 없더라”고 웃었다. 농담이긴 했지만, 실제로도 1978년에야 고리 1호기가 가동됐을 정도로 한국의 원전 개발 속도는 느렸다. 장 석학연구원은 “1960년대에는 경제성장이 안 돼서 원전이 필요할 만큼 전력 소비가 크지 않았을 것”이라고 이유를 추측했다.

1965년 미국 유학길에 오른 그는 1971년 미시간대에서 원자력공학 박사학위를 딴 뒤 1974년 아르곤연구소에 입사했다. 1984∼1994년 10년 동안 차세대 고속로와 파이로프로세싱 기술 개발 프로젝트 총책임을 맡았다. 이 사이에 1993년 로런스상을 수상했다. 1998년에는 아르곤연구소 부소장에 올랐고, 1999∼2000년 소장 대리까지 지냈다.

77세의 나이에도 장 석학연구원은 아주 건강하다. 걷기 운동도 하지만, 특히 골프를 즐기면서 건강 관리를 하고 있다. 그는 “골프는 한 30년 쳤는데, 지금은 실력이 오히려 줄어들고 있다”며 “핸디캡은 묻지 마세요”라고 웃었다.


△1942년 평북 의주 출생 △보성고 △서울대 원자력공학과 △텍사스 A&M대 석사 △미시간대 원자력공학 박사 △미국 아르곤국립연구소 소장 대리 △미국 원자력학회 회원 △카이스트 초빙교수


김성훈 기자 tarant@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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