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당연한 말이지만 오케스트라가 자국 청중에게 신뢰를 얻는 일은 어렵다. 한국에서는 정말로 그렇다. 몇 년에 한 번씩 내한하는, 또는 처음 한국을 방문하는 해외 유명 오케스트라의 공연 소식을 기다리고 기대하는 클래식 음악 애호가는 많지만 자국 오케스트라의 정기 공연을 꾸준히 찾고 응원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상임지휘자와 오케스트라가 레퍼토리를 체계적으로 확대해 커리어를 착실하게 쌓아 올린 대표적인 사례가 서울시립교향악단이다. 서울시향은 한 해 공연을 묶은 패키지 티켓을 판매해 고정 관객을 확보하는 게 가능해졌다. 그리고 몇 년간 내홍을 겪은 KBS교향악단도 이제는 믿고 보는 오케스트라라고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는 듯하다.
옛날이야기를 꺼내는 게 그리 바람직하진 않지만 KBS교향악단은 지휘자와 단원 간 이해 충돌로 서로가 눈을 마주치지 않으면서 공연을 한 적도 있다. 10년이 채 안 된 일이고, 당시 공연장에 있던 필자를 포함한 일부 관객은 그 냉랭한 기운을 기억할 것이다. 당시 실망스러운 연주가 반복됐고, 각종 추문이 퍼지면서 음악 팬들은 KBS교향악단에 점점 더 등을 돌렸다.
2014년 루마니아 출신 지휘자 요엘 레비가 부임한 이후 새로운 음악적 방향성을 안정적으로 찾기 시작한 KBS교향악단은 실력과 개성을 두루 갖춘 믿음직한 오케스트라로 거듭났다. 지난 1월 31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제738회 정기연주회(사진)는 이를 완벽히 증명하는 값진 시간이었다.
첫 곡인 베를리오즈의 ‘해적 서곡’의 도입부가 시작되자마자 날렵하고 경쾌한 현악기 사운드가 귓가를 단숨에 사로잡았다. 자신감이 붙은 말끔한 보잉과 입체적으로 디자인된 사운드가 돋보였다. KBS교향악단은 베를리오즈의 화려한 짧은 서곡에 긍정적인 기운을 듬뿍 담아 생기 넘치게 펼쳐 보였다. 시크한 매력을 강조하기보다는 공연장을 찾아준 청중을 환영하는 친근하고 다정한 인사에 가까웠다.
한동안 독일 정통 레퍼토리에 천착한 피아니스트 김선욱의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3번은 한국 팬들에게 반가운 선곡이었다. 진중하고 무게감 있는 프로그램에서 벗어나 오랜만에 폭발적이고 정력적인 작품을 만났지만, 김선욱은 지적이고 깔끔한, 특유의 품위를 잃지 않았다. 마음대로 비유해보자면 점잖은 신사의 극적인 로맨스를 바라보는 느낌이랄까.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물에 고개를 처박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백조의 유영을 바라보는 느낌이랄까. 다이내믹은 살아 있었지만 결코 과하지 않았고, 황홀하고 정열적인 선율의 도취는 자신이 계획한 틀 안에서만 허용했다. 오랜만에 만난 김선욱의 라흐마니노프는 흥미로웠고, 아름다웠다. 특히 1악장 카덴차와 찬란하게 노래하다 휘몰아치는 파이널에서 그 진가가 도드라졌다.
라흐마니노프 3번과 차이콥스키 교향곡 4번에서 KBS교향악단은 감정을 과시적으로 드러내는 대신 담백하고 깔끔한 연주를 들려주었다. 전체적으로 무게감을 덜어내고 가볍게 나아가는 한편 악상과 다이내믹을 강조하고, 균형감을 절묘하게 드러내는 방식은 현대의 청중에게 어필하기에 효과적이다. 공석인 악장 자리에 앉은 객원 단원인 오토 데롤즈가 진취적인 흐름을 주도하며 트렌디한 사운드에 안정감을 더했다. KBS교향악단의 이러한 특징은 최근의 서울시향 연주와 대조를 이룬다. 두 악단을 꼭 비교할 필요는 없지만, 서로 다른 개성을 지닌다는 건 한국 음악 팬들에게는 매우 반가운 일이다.
KBS교향악단은 오는 21∼22일 지휘자 야프 판 즈베던을 초청해 연주회를 개최한다. 네덜란드 태생으로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한 바 있는 즈베던은 네덜란드 라디오 필·댈러스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을 역임했고, 현재 뉴욕 필하모닉·홍콩필하모닉의 음악감독으로 재임하고 있다. 세계무대에서 혁신적인 지휘자로 손꼽히며 왕성한 활동을 보이고 있다. KBS교향악단과의 첫 무대에서 그는 바그너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전주곡’과 브루크너 교향곡 8번을 선보인다.
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 KBS교향악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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