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 무의식 다룬 유일한 저작
1994년 유족과 번역출간 계약
난해한 작업속 진행·멈춤 반복
유족의 검토 과정도 4년 걸려
“번역 불가능” 말한 이어령 교수
“큰일 했다”며 칭찬 아끼지않아
20세기 인문학·예술에 거대한 영향을 미친 자크 라캉(1901~1981)의 ‘에크리’가 25년의 지난한 번역과정을 거쳐 국내에서 처음 출간됐다. 국내 인문학이나 출판의 측면에서도 ‘사건’인 셈이다. 라캉은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나 파리 의대를 졸업하고 1932년 의사자격 취득 후 평생을 정신분석가로 활동했다. 그는 정상적 자아의 회복이라는 축소되고 곡해된 ‘자아심리학’에 맞서 프로이트의 인간 이해가 가져온 혁명적 본질을 탐색하는 ‘프로이트로 돌아가자’라는 주장과 방법론을 펼치며 심리분석 분야뿐 아니라 인문학 전 분야에 영향을 미쳤다. ‘에크리’는 1966년에 나온 그의 유일한 논문집이다. 새물결출판사의 이번 번역본은 1966년 판본을 기준으로 했다.

출간까지 25년이 걸린 것은 우선 번역의 난해함으로 진행과 멈춤을 거듭했기 때문이지만, 최종 출간 단계에서 라캉 유족의 ‘검토’ 과정도 길었다. 라캉 연구자로 책의 번역에 참여한 조형준 새물결출판사 주간은 “라캉 책은 전 세계 번역본이 계약 시 유족의 검토를 거치게 돼 있다. 한국어 번역본을 보낸 뒤 4년 정도가 걸려 승인됐다”고 말했다. 번역본에는 ‘옮긴이의 말’이나 각주가 하나도 없다. 원본 이외에 추가하지 않을 것 또한 계약사항이다. 책은 조 주간을 비롯해 독일 브레멘대 철학박사인 홍준기, 파리 8대학 정치사회학 박사인 이종영, 전문연구자인 김대진 등이 참여했다. 조 주간은 “그동안 이래저래 거쳤다가 떠난 사람까지 치면 번역에 참여한 사람은 10명 정도인데, 그 이면에 사연도 많았다”고 토로했다.
‘에크리’는 번역부터 쉽지 않은 책이다. 출판사와 인연이 있는 이어령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에크리’의 힘겨운 번역과정을 지켜보며 “‘에크리’는 언어학적으로도 번역 불가능하다”고 말했었고, 책의 초고를 보고는 “큰일을 했다”고 칭찬했다고 한다. 앞서 라캉이 생전에 직접 관여해 번역된 일본어판이나 스페인어판도 나중에 라캉 연구자들 사이에 수없이 많은 오역 논란과 ‘해석투쟁’이 뒤따랐다.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가 “라캉의 글쓰기의 모호함은 주체의 복합성 자체에 상응하는 것으로, 그의 글을 이해하려면 ‘나’를 완전히 바꾸는 어떤 작업이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고 했는데, ‘에크리’의 난해함과 접근방법을 잘 표현한 것으로 평가된다. 인간의 무의식을 다룬 데다 라캉의 의도된 모호한 글쓰기로 어려울 수밖에 없다. 조 주간은 “초역이 완역된 후 외국의 가능한 모든 판본을 여러 차례 교차 대조했고, ‘이해 불가능한 것은 이해 불가능한 것으로 확인까지 해두자’라는 원칙에 따라 번역했다”면서 “‘에크리’를 가독성 있게 번역하는 것뿐만 아니라 일종의 ‘지적 오르가슴’을 느낄 수 있도록 완역하는 것이 목표였다”고 말했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가 “라캉의 도발 없이 지난 수십 년간 사유의 공간을 변형시킬 수 있었던 것은 없다”고 말했듯, 라캉은 20세기 후반 인문학의 대양이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라캉이 주로 슬라보이 지제크 등을 경유해 우회적으로 소개됐고, 정신분석의 임상보다는 문화비평의 도구로 ‘유용’되거나 ‘교양’ 수준에 머물렀다. 라캉의 ‘정신분석’의 핵심인 ‘인간에 대한 이해’로 나가진 못했다는 지적을 받는 이유다. 라캉의 사상은 푸코의 말처럼 ‘나를 변화시켜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그곳까지 안내하는 것이다. 조 주간은 “모든 학문을 섭렵하면서 전 세계 독자들을 끌고 다닌 라캉은 세계 인문학계의 ‘백경’(白鯨·허먼 멜빌의 소설)과 같이 전 세계 바다를 누빈 거대한 고래다. 그것을 이제 뭍으로 끌어올렸지만, 겁이 나고 두렵기도 해서 어디 가서 숨고 싶다”고 ‘에크리’의 완역을 끝낸 소감을 말했다.
엄주엽 선임기자 ejyeob@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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