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토 히로부미 처단한 독립운동의 뿌리 안중근

中 하얼빈이공大 김월배 교수
日 국회도서관서 14건 찾아내

‘동양평화 전력 다해달라 유언
유해는 특별히 침관에 안치돼
뤼순감옥 묘지에 정중히 매장’
기사엔 존경과 숙연함 묻어나

옥중서 남긴 ‘동양평화론’엔
韓·中·日 공동화폐 발행 제안
유럽연합구상보다 반세기 앞서
中학자 “평화위해 몸바친 위인”


3·1운동 전사(前史)는 안중근을 빼고 말할 수 없다. 3·1운동 100년을 맞는 올해는 안중근 의사 의거 110주년과 탄생 140주년이다. 3·1운동 10년 전 하얼빈 역두에서 한국 침략의 원흉이며 동양평화의 교란자였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주살한 안중근의 의거가 없었다면 3·1운동의 민족독립에 대한 민족적 결기와 근대적 정신은 더 늦춰져 발현됐을 것이다.

◇새로 발견된 안중근의 최후 기사…‘고국 반장(返葬)’의 恨

1910년 3월 10일 안 의사가 남긴 최후의 유언 중 “하얼빈에 묻었다가 고국 독립 후 반장(返葬·객지에서 죽은 이를 고향으로 옮겨 장사지내는 것)해 달라”는 유지는 아직 우리 후손들이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다. 안 의사 유해 찾기에 몰두해온 중국 하얼빈이공대 김월배 교수는 최근 일본 도쿄(東京) 국회도서관 신문자료실에서 안중근 의사 사형 집행과 매장지를 보도하는 새로운 신문 기사를 발굴해 이 중 3건을 문화일보에 전해왔다. 일본 기자가 썼지만, 그 문맥에서 기자와 사형 집행자들의 존경과 숙연함이 묻어나는 걸 느낄 수 있다.

먼저 안 의사 순국 다음 날인 1910년 3월 27일 도쿄 아사히신문은 전날 ‘뤼순 특파원 발(發)’ 기사에서 사형 집행과 매장 상황을 전했다. 기자는 “26일 오전 10시 정각에 이르자 간수에게 이끌려 형장에 들어온 그(안중근)는 고향의 사촌동생 안명근이 특별히 수의로 지어 보내준 새하얀 명주 한복을 입고, 안색이 약간 창백했으나 각오에 찬 모습으로 보였다”며 마지막까지 당당한 안 의사의 모습을 전했다. 또 “교도소장은 피고에게 사형 집행문을 낭독하고 유언이 있는지를 물었다. 안중근은 특별히 남길 말은 없지만, 마지막으로 현장에 있는 사람들에게 청한다면 동양평화를 위해 전력을 다해달라고 하고 그 외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이어 “유해는 오후 1시에 공동묘지에 정중히 매장됐다. 안중근의 동생 2명 등이 교도소장에게 면회를 요청해 사체 인도를 청원했으나 결국 허가되지 않아 초연히 자리를 떴다”고 전하고 있다. 공동묘지는 뤼순 감옥서 묘지를 말한다.

같은 날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은 ‘안(安)의 최후’라고 제목을 단 ‘뤼순 래전(來電)’ 기사에서 비슷한 사형 집행 상황을 전하면서 안 의사가 “교수대 위에서 동양평화 만세를 외치고 싶다”고 희망했다고 전했다. 만세를 외쳤다는 내용은 없는 것으로 미뤄 교도소장이 막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기자는 “사형이 집행된 후 안중근의 유해는 특별히 침관(寢棺)에 안치돼 정중히 대우를 받으며 감옥묘지에 매장됐다”고 전했다.

새로 발견된 신문기사 중에서 대만일일신문(당시 일제의 식민정책을 선전했던 기관지) 3월 30일 자는 “안중근 매장지”라는 제목을 달아 관심을 모았으나 기사에 매장지가 특정돼 있진 않았다. 당시 안중근 매장지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높았는지를 보여준다. 이 기사는 “안중근의 사형 집행일로 결정된 27일은 이미 보도한 바와 같이 한국 건원절(乾元節·순종 탄신일)에 해당하기 때문에 통감부의 연기 요청을 받아들여 26일로 변경됐다”고 이미 알려진 내용을 확인했다. 이어 “유해매장지로 안중근은 하얼빈을 희망하고 어머니는 고향 신천(新川, 황해도)을 주장했으나(…) 결국 뤼순에 매장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고 전했다. 안 의사와 안 의사 모친의 희망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일제는 불법 재판에 의한 사형 집행도 모자라 저들의 국내법까지 어겨가며 안 의사의 유해를 유족에게 인도하지 않는 비인도적 만행을 저질렀다. 안 의사의 묘소가 독립운동의 성지가 되고 제2, 제3의 안중근이 나올 것을 우려한 것이다. 묻힌 곳이 뤼순 감옥서 묘지로만 알려졌으나 일제 때는 유족조차 참배할 수 없었고, 해방 이후에는 소련군의 점령-중국 공산화-남북 분단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굴곡 탓에 안 의사 유해 찾기를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그동안 유해 발굴에 남북이 각각 나서기도 하고 공동으로 발굴 작업을 벌이기도 했지만 허사였다. 정부는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북한과 공동사업으로 안중근 의사 유해 발굴을 제안해놓고 있다.

◇기미독립선언서에 맞닿아 있는 동양평화론

한상권 덕성여대 사학과 교수는 “안중근의 국권회복 운동은 군주주권의 전제주의 청산과 국민주권의 공화주의 정부 수립을 지향하는 것이었으며, 이는 3·1운동 이후 임시정부 수립으로 구체화됐다”고 말한다. 안중근의 정치사상은 군주정을 비판하고 국민주권의 공화정을 지향했다. 안 의사가 죽음을 앞두고 뤼순(旅順) 감옥에서 남긴 ‘동양평화론’은 110년이 지난 지금도 빛이 바래지 않고 있다. 그는 이토를 살해한 이유에 대해 “한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한 것이니, 그를 포살한 것도 사적 원한에서가 아니라 그런 목적이었다”고 했으며, 한국과 일본, 청나라가 뤼순에 동양평화회를 조직하고 공동화폐를 발행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사학자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는 “당대 구미의 어느 지식인도 언급하지 않은 것이며 유럽연합(EU) 구상보다 반세기나 앞서는 것”이라고 평가한다. 중국학자 예텐니(葉天倪)는 저서 ‘안중근전(傳)’에서 “안중근은 제국주의 침략에 유린되는 평화를 지키려던 평화주의자이며 세계평화를 위해 자기 몸을 바친 ‘세계위인(世界偉人)’이라 예찬했다. 동양평화론은 이후 3·1독립선언서에서 천명하는 인류 평등과 평화 등 민족주의의 틀을 넘어선 문명성으로 이어졌다.

엄주엽 선임기자 ejyeob@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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