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우센버그 드 쿠닝을 지우다 1953, 64.14×55.25㎝. SF MOMA
라우센버그 드 쿠닝을 지우다 1953, 64.14×55.25㎝. SF MOMA
라우센버그 ‘드 쿠닝 지우다’
규칙 깨기로 현대미술 전환점


남의 그림을 지우는 것이 작품이 될 수 있을까? 세상의 모든 것이 가능한 현대미술의 세계에서는 가능한 일이다. 지난 2017년 11월 18일부터 2018년 3월 25일까지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현대미술관(SF MOMA)에서 열린 ‘규칙 지우기’(Erasing the Rules)라는 제목의 로버트 라우센버그(Robert Rauschenberg·1925~2008) 회고전이 열렸다. 마침 미국 서부지역 미술관을 안내하는 책을 쓰기 위해 취재 여행을 하던 차라 1995년 마리오 보타(Mario Botta·1943~)의 설계로 제2의 개관을 한 후 노르웨이 건축회사 스노헤타(Snøhetta)의 설계로 2016년 증축 개관한 미술관에 들렀다 라우센버그의 작품을 만났다.

그는 회고전의 제목처럼 규범과 규칙을 깨며 새로운 시도로 일관한 작가다. 그의 파격으로 점철된 전시를 보다 문득 소품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아무것도 그려진 것이 없는 백지가 금박액자에 담겨있다. 그리고 그 아래에 ‘ERASING de KOONING DRAWING, ROBERT RAUSCHENBERG, 1953’이란 명패가 붙어 있다. 현대미술에서 워낙 유명한 작품인지라 책에서 읽은 적은 있지만 실제로는 처음 대하는 작품이었다. 사실 라우센버그는 수많은 방황 끝에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 나갔다. 그는 특히 청년기인 1951년부터 1953년까지 약 3년간 현대미술을 추구하는 청년작가들이 누구나 그러하듯 예술의 한계와 정의를 탐구하는 개념적인 작업에 몰두했다. 이는 마르셀 뒤샹의 예술과 예술가의 개념을 규명하고 그 영역을 확장하고자 했던 일에서 비롯됐다. 그는 그림을 그리지 않고 지워서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래서 처음에는 자신이 그린 그림을 지워서 소위 흰색작업(White Paintings)을 시도했다.

정준모 큐레이터·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정준모 큐레이터·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하지만 이 실험이 성공하려면 적어도 명확하게 사회적으로 예술품으로 인정받고 있는 중요한 작가의 주요작품을 지워야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그는 평소 존경했던, 당시 인기작가의 반열에 들었던 드 쿠닝(1904~1997)에게 잭 대니얼 한 병을 사 들고 찾아가 지울 그림을 부탁했다. 당돌한 청년작가의 제안에 조금 망설이던 드 쿠닝은 작품을 내주었고 라우센버그는 약 2개월간 매달려 지웠다. 그리고 2년 뒤 작품을 본 재스퍼 존스(Jasper Johns·1930~ )는 이 작품에 명제와 명제표 그리고 액자를 고안해 완성했다. 아마도 여기에 드 쿠닝의 작품을 라우센버그가 지웠다는 지시어가 없다면 우리는 그 안에 무엇이 있었는지, 처음부터 백지였는지 아니면 지워져서 백지상태로 환원된 것인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존스의 명제표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2010년 이 작품을 소장한 SF MOMA는 지워진 그림 안에 들어 있는 ‘지운다’는 의미를 더욱 강조하기 위해 엑스레이를 찍고 디지털 캡처기술을 사용해 도대체 무엇을 지웠는지 찾아보기로 했다. 사실 무엇을 지웠는가 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우선 본능적인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것은 물론, 그가 우상으로 삼았던 작가의 작품을 지우기로 했을 때 무엇을 고민하고, 무엇 때문에 그런 작업을 하려고 마음먹었을까를 추론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엑스레이상으로는 드 쿠닝의 전형적이고 우람한 3~4개의 여성상이 눈에 띈다. 그리고 특히 드로잉을 할 때 연필과 목탄을 쓰고 지우개를 많이 사용했던 드 쿠닝의 버릇 때문에 사실은 지워진 흔적들이 누가 지운 것인지 분명하지 않아 보는 이를 더욱 모호하게 만든다. 사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지운다는 개념이지 드 쿠닝의 지워지기 전 그림의 모습은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지우기로 한 것이며 지웠다는 사실이다. 오마주, 도발, 유머, 부친 살해(patricide), 파괴 또는 라우센버그의 드 쿠닝에 대한 찬사이건 간에 보는 이들에게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도록 해준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리고 드 쿠닝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찬미라는 점 그리고 지워서 그림을 완성하겠다는 점 또한 현대 미술의 전환점이 되고 있다.

큐레이터·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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