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안동에 있는 이육사문학관에 가서야 알았습니다. 육사의 딸인 선생이 문학관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을. 지난 1일, 선생은 지역의 3·1운동 10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하느라 문학관에 없었습니다. 그날 만나지 못하고 통화만 했던 아쉬움을 달래며 편지를 씁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육사는 가혹한 아버지입니다. 딸 이름을 옥비(沃非)라고 하다니. 기름질 옥(沃)에 아닐 비(非), 풍족을 누리며 살지 말라는 뜻 아닙니까. 1941년에 태어난 딸에게 일제에 고개 숙여 일신의 편안함을 구하지 말라고 엄명을 내린 것이지요. 아버지 이육사는 당시 37세였습니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수차례 옥살이를 했던 그는 폐질환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런 몸으로 중국으로 건너가 국내에 무기 반입을 시도했다가 또다시 투옥됐지요. 만 40세였던 1944년, 베이징 감옥에서 순국했습니다.
선생은 네 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습니다. 어머니와 주변 인척들에게서 들은 아버지 이야기는 자랑스러우면서도 서러운 것이었습니다. 육사는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생 동기였던 처남이 일경의 고문에 못 이겨 동료들 이름을 토설한 것을 알게 되자, 처가에 편지를 써서 “더러운 혈통을 물려받은 딸과 함께 살 수 없으니 데려가라”고 했다더군요. 참으로 무시무시한 엄결성입니다. 그런 아버지가 타계한 후 어머니는 수십 년 동안 흰옷만 입었습니다. 남편을 경외해서였지요. 그 어머니의 회고에 의하면, 육사는 일제에 온몸으로 항거한 지사였으나 일상에서는 주변 사람들을 따뜻하게 배려하는 인물이었다지요. 그런 성품으로 미뤄볼 때, 자신의 옥사 이후에 아내와 딸이 각다분한 삶을 살게 된 것에 대해 저세상에서 못내 미안하게 여겼을 듯싶습니다.
선생은 육사의 외동딸입니다. 위로 오빠와 언니가 있었으나 홍역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가문에선 육사의 사후에 동생 아들을 그의 양자로 들였지요. 그 아들도 연전에 타계했다더군요.
말 그대로 육사의 일점혈육인 선생은 문학관에서 지난 2007년부터 일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육사추모사업회가 안동시 위탁을 받아 운영하는 문학관에 일본어 통역원이라는 이름으로 들어왔다니 여러 감회를 자아내더군요. 선생은 대학 다닐 때 일어를 ‘조금’ 배웠다고 했습니다. 제대로 공부하고 싶었으나 어머니가 “원수의 나라 말을 배우지 마라”고 해서 부전공만 했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일본으로 건너가 니가타 한국총영사관에서 궁중요리를 만드는 일을 했습니다.
“일신상의 이유로 일본에 가서 6년을 살았는데, 결과적으로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일본인의 근성을 알게 됐으니까요. 개인적으로는 점잖고 선량한데, 집단이 되면 너무 무섭지요. 우리는 이웃 나라인 일본과 잘 지내되, 모든 것을 다 내주지 않고 자신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해요.”
선생은 현재 문학관 상임이사로 일하며 관람객들에게 육사의 일화 등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일본인 단체 관람객이 가끔 오는데, 내가 일어를 하지 않고 통역을 따로 씁니다.” 선생의 이런 설명 속엔 일제가 오늘의 우리에게까지 드리운 그늘이 있습니다. 일제에 의해 순국한 육사의 딸이 일어를 하는 것을 비뚜름하게 보는 시선이 있을 것이고, 선생은 그걸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올해 79세인 선생의 말투는 카랑카랑하면서도 어딘지 품격을 느끼게 합니다. 그게 육사의 딸이라는 부담 혹은 자존심과 맞닿아 있겠지요. 혹시 퇴계 이황 후손의 유전인자가 작용하는 것은 아닐까, 혼자 생각해봤습니다. 이번에 문학관 자료를 통해 육사가 퇴계 후손이라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됐습니다. 안동 도산 지역에 자리한 선비 집안의 기개가 폭압에 대한 저항으로 나타났음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육사는 일본과 중국 등에서 신식 학문을 익혔으나 그 정신의 바탕엔 한학(漢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고 보면, 안동 출신 시인 김종길이 영문학 대가이면서도 한학의 세상을 늘 그리워했던 것은 그 연원이 있었네요.
육사는 윤동주와 함께 일제 말기 한국 문학의 암흑기를 뚜렷하게 밝히는 별입니다. ‘청포도’ ‘절정’ ‘광야’ 등의 시를 썼을 뿐만 아니라 소설, 수필, 평론 등 다양한 양식으로 활동했습니다. 독립 투쟁을 했던 생애의 숨결이 문학에도 스며 서정성과 함께 저항성이 두드러집니다. 역시 해방 직전에 옥사한 윤동주의 시 작품에도 저항 의식이 있으나 내면화했다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또한 동주는 직접적인 항거 운동에 나서지는 않았지요.
저는 윤동주에 대한 논문을 썼을 정도로 그의 생애와 시 작품을 사랑합니다. 육사도 그만큼 애정이 있다고 여겼으나 착각이었습니다. 제대로 아는 것이 없었음을 이번에 깨달았습니다. 안동이 고향인 후배 기자도 “문학관에 가서 육사의 생애를 살펴보고 나서야 그동안 너무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하더군요.
육사가 독립운동가 건국훈장 서훈에서 4등급(애국장)을 받았다는 것도 처음 알았습니다. 굳이 다른 분의 서훈 등급을 따질 것도 없이 형평에 맞지 않는 대우라고 생각합니다. 국가에 의한 재평가가 필요한 것이지요.
며칠 전 선생 자택에 독립유공자 명패가 달렸다고 들었습니다. 국가보훈처에서 추진한 일로, 만시지탄(晩時之歎)이나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육사도 저세상에서 딸에 대한 미안함을 조금 내려놓았을 것입니다.
장재선 기자 jeijei@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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