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몽
18세기 프랑스 상류사회를 배경으로 귀족들의 성 놀음을 풍자한 피에르 쇼데를로 드 라클로의 소설 ‘위험한 관계’는 일곱 차례나 영화로 만들어졌다. 로저 바딤(1959), 스티븐 프리어스(1988), 허진호(2012) 등 프랑스와 영국, 한국 등 동서양 유명 감독들이 동명 영화를 내놓았다. 다국적 리메이크작의 스펙트럼을 보면 원작이 얼마나 매력적인 프로젝트였는지 가늠할 수 있다.
이번에 소개할 작품은 ‘아마데우스’를 연출한 거장 밀로시 포르만 감독의 1989년 버전 ‘발몽’(사진)이다. 메르떼이유 후작 부인(아네트 베닝)은 남편과 사별 후 수많은 정부를 거느리며 여생을 즐기는 상류층 사교계의 중심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연인 제르쿠르(제프리 존스)가 15세의 어린 조카 세실(페어루자 보크)을 상대로 정략결혼을 계획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제르쿠르는 어린 신부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 메르떼이유 후작 부인의 사촌인 세실의 엄마 볼랑쥬 부인(시안 필립스)과 합의해 그를 수녀원에 가둬두었다가 결혼 날짜가 다가오자 집으로 돌아오게 한 것이다. 이에 분개한 메르떼이유 후작 부인은 파리의 소문난 호색한 발몽(콜린 퍼스)에게 세실이 제르쿠르와 결혼하기 전에 순결을 빼앗아 주면 자신과의 하룻밤을 선물하겠다는 거래를 제안한다. 그러나 발몽은 뚜르벨 부인(멕 틸리)을 짝사랑하고 있어, 그를 침대로 끌어들이기 위한 갖은 술수를 고민하느라 바쁘다. 어른들의 더러운 거래가 오가는 동안 세실은 하프 선생 당스니(헨리 토머스)와 사랑에 빠진다.
메르떼이유 후작 부인은 세실과 당스니의 연애를 돕는 척, 그들의 메신저가 돼주기로 한다. 일이 생각보다 빨리 진척되지 않자 안달이 난 메르떼이유 후작 부인은 볼랑쥬 부인을 설득해 세실을 데리고 발몽이 머물고 있는 한 교외의 친척 집으로 휴가를 떠난다. 뚜르벨 부인도 친척 방문차 머무르고 있는 이 저택에서 결국 메르떼이유 후작 부인의 난잡한 계략이 현실로 이뤄진다. 거대한 만찬으로 다들 취한 틈을 타 세실의 방으로 발몽을 보낸 것이다. 뚜르벨 부인에게 수차례 유혹을 거듭했지만, 거절당한 발몽은 세실의 순결한 육체로 위안을 삼기로 한다. 발몽은 당스니에게 보낼 연애편지를 쓰고 있던 세실의 스타킹을 어루만진다. 펜을 쥐고 있던 세실은 묘한 쾌감에 고개를 젖힌다. 주저하는 세실의 코르셋이 벗겨지고 발몽의 품으로 완전히 포획되는 동안 메르떼이유 후작 부인은 와인을 홀짝거리며 천박한 승리를 자축한다. 세실은 수녀원을 벗어나 처음 느껴보는 흥분에 압도돼 결국 발몽을 뿌리치지 못한 채 그와 밤을 보낸다. 기세등등한 발몽은 메르떼이유 후작 부인에게 대가를 요구하지만, 부인은 거절하고 당스니에게 발몽이 세실을 범했다는 사실을 밝힌다.
따라서 영화의 엔딩에서는 순결을 짓밟고 유부녀를 유혹했던 발몽만 대가를 치른 셈이지만 또 다른 이면에선 그의 악행은 곧 당스니가, 메르떼이유 후작 부인의 계보는 세실이 이어갈 것임을 예고한 것이기도 하다.
포르만 감독의 작품은 원작에서 강조된 사회풍자와 비판은 미약하지만, 귀족들의 차고 넘치는 부(富)와 사치의 재현은 이미지의 기록이 아니라면 엿볼 수 없는 영화의 고유한 미덕이기도 하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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