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의 말레이시아 방문 하루 전인 11일 말레이시아 정부가 인도네시아 국적의 김정남 독살 용의자를 풀어줬다. 문명국가라면 화학무기 테러이자 반인륜적 만행인 독살 사건에 엄중히 대처하는 게 정상이다. 그런 기본을 도외시한 말레이시아의 황당한 결정은 나름의 국익을 위해 국격을 내팽개친 것으로 치부하면 되지만, 대한민국 입장에선 따져볼 일이 많다. 우선, 외교적으로 무시당한 것으로 보인다. 말레이시아 측은 ‘법리적 해석’ 아닌 ‘외교적 고려’라고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남북관계는 물론 북한 주민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헌법 취지 등을 고려했다면, 문 대통령 방문 시기를 피하는 게 정상이다. 만에 하나, 문 정부와 협의해 내린 결정이라면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이로써 김정남 독살의 진실은 미궁에 빠질 가능성이 커졌다. 인도네시아인을 석방한 이상 베트남 국적의 용의자도 석방할 것으로 보이며, 말레이시아 검찰이 암살자로 지목한 4명의 북한인은 이미 북한으로 도주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김정남 독살은 백주에 국제공항 한복판에서 국제적으로 금지된 대량파괴무기인 VX 신경작용제를 사용한 테러다. 결과적으로 이번 조치는 북한 테러에 면죄부를 주는 셈이다.

대한민국은 이번 사건의‘제3자’일 수 없다. 북한 정권의 이러한 반인륜적 화학무기 테러를 방관한다면, 유사한 테러가 대한민국 영토 안에서 벌어지는 것을 막기 힘들게 된다. 이런 직접적 위험이 없더라도 문명국가라면 당연히 반인륜적 테러 방지에 앞장서야 한다. 미국은 그 사건 직후인 2017년 11월 북한을 테러 지원국으로 재지정했다.

문 정부가 지금까지 보여준 태도를 보면 수수방관한다는 의구심을 갖게 된다. 심각한 테러이자 인권 유린 사태에 대해 이제라도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말레이시아 정부에도 항의해야 한다. 석방에 분개한 ‘자유조선’이라는 반북(反北)단체는 말레이시아 주재 북한 대사관에 ‘김정은 타도’라는 낙서 투쟁을 감행했다. 김정은이 싫어할까봐 할 말도 못한다면, 진보·인권·평화 등의 가치를 입에 올릴 자격도 없다.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