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숙 논설위원

허풍으로 가득 찬 부동산업자 출신 리얼리티 쇼 진행자를 백악관으로 이끈 힘은 분노다. 도널드 트럼프의 분노는 세상에서 밀려나 분노한 백인들을 투표장으로 나오게 했지만, 이젠 그 분노가 그 자신은 물론 미국 정치를 삼킬 기세다. 분노가 미 정치의 핵심 개념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심지어 트럼프 대통령의 분노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핵무기보다 위험한 대량파괴무기(WMD)라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분노는 지난해 11월 중간선거 때 민주당이 하원을 장악하면서부터 더욱 깊어졌다. 내년 11월 대선을 앞두고 민주당이 기세등등하게 탄핵 가능성까지 내비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트럼프 시대 베스트셀러인 마이클 울프의 ‘화염과 분노(Fire and Fury)’나 밥 우드워드의 ‘공포(Fear)’의 키워드도 분노다. 트럼프 대통령의 분노 때문에 제정신을 가진 사람은 단 하루도 백악관에서 버티기 힘들다는 게 이 책들의 공통적 줄거리다. 오죽하면 존 켈리 백악관 전 비서실장이 백악관 시절을 “미친 세상에 있던 날들”이라고 했겠는가. 미국 언론들은 요즘 트럼프 대통령을 분노하는 ‘미친 왕’처럼 묘사하고 있다. 러시아의 2016년 미 대선 개입을 조사한 로버트 뮬러 특검의 발표가 임박하면서 더 자제력을 잃고 있기 때문이다. 하노이 미·북 회담 결렬에는 거의 동시에 진행된 마이클 코언 청문회에 대한 분노도 작용했고, 트럼프 대통령도 청문회의 ‘시기’를 비난했다.

야당도 분노엔 분노로 맞서자는 캠페인을 시작하고 있어 2020 대선 키워드도 분노가 될 조짐이다. 백인 우월주의자들로부터 ‘성난 흑인 여자’라는 공격을 받아온 미셸 오바마는 최근 펴낸 자서전 ‘비커밍(Becoming)’에서 분노로 맞대응하자고 제안했다. 미셸은 2016년 민주당 전당대회 때 “그들이 비열하게 굴더라도 우리는 품위를 지키자(When they go low, we go high)”고 했지만, 백악관을 나온 뒤엔 달라졌다. 더 힐은 “트럼프를 용서할 수 없다”는 정서가 2020년 대선에서 민주당을 규합시킬 단순하고도 강력한 도덕적 나침반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했다. ‘분노로 흥한 자 분노로 망한다.’ 요즘 미국 정치판에 딱 어울리는 말이다. 그러나 미국 정치의 그런 양상은 세계를 더 어지럽게 하고, 특히 한·미 동맹 불안도 키울 소지가 있어 태평양 너머 딴 나라 일만은 아니다.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