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태생의 스웨덴 작가 테오도르 칼리파티데스(81)는 일흔일곱 어느 날 ‘은퇴’를 고민합니다. 서른한 살에 데뷔해 40여 권의 책을 낸 스웨덴 문학의 거장이 에너지가 완전히 소진돼 한 줄도 쓸 수 없게 됩니다. 그는 안톤 체호프의 조언대로 옷을 입은 채로 샤워기 아래 서봅니다. 체호프는 물에 젖은 개처럼 몸을 흔들면 절망도 함께 떨어져 나간다고 했답니다. 하지만 회복은커녕 감기에 걸리고 슬픔은 더 깊어집니다. 두 달 동안 온갖 시도 끝에 그는 작업실 문을 닫습니다.

‘다시 쓸 수 있을까’(어크로스)는 인생의 후반기에 모든 것에 지쳐버린 노작가가 오랜 분투 끝에 다시 글을 쓰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담담한 감동의 책입니다. 어떻게든 실마리를 찾으려 사람들을 만나고 먼 동네까지 걸어가고 여름별장으로 떠나보지만 답이 없습니다. 결국 그는 고향, 그리스로 갑니다. 스물다섯 고향을 떠나기 전 옛 애인이 보낸 편지의 한 구절 ‘돌아와요. 우리는 아직 산책할 길이 많이 남았잖아요’에 문득 맘이 움직였습니다. 때마침 고향 마을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이 마을 원형극장에서 공연을 하니 보러 와달라는 요청도 있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질문 앞에 ‘떠나라’는 답을 따라 스웨덴으로 왔듯이 이제는 ‘돌아가라’는 마음의 소리를 따라 그리스로 갑니다. 소설가 필립 로스의 ‘기억이 사라지면 글을 쓸 수 없다’는 말을 따라 자신의 마음을 움직여줄 기억을 찾으려 합니다. 친척을 만나고, 친구의 장례식장에 가고, 자기 이름을 딴 고향 마을 거리에도 서봅니다.

좀처럼 풀리지 않던 매듭은 보름달이 유난히 크게 뜬 여름날 밤, 고향 마을 원형극장에서 아이스킬로스의 비극을 보며 풀려버립니다. 별은 반짝이고, 옛 비극을 연기하는 아이들의 목소리, 그때 갑자기 정전이 됩니다. 순간 그는 밤새 전기가 나갔다 들어왔다 했던 유년 시절을 떠올립니다. 인생이 멈춘 듯하지만 곧 다시 굴러갔던 느낌,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 같은 느낌에 휩싸입니다. 아이스킬로스의 대사는 메마른 땅을 적시는 빗줄기처럼 쏟아져 그의 언어가 됩니다. 다음 날 그는 그리스어로 한 문장을 씁니다. “힘든 때였다”. 이 책의 첫 문장입니다. 책은 그가 50여 년 만에 그리스어로 쓴 첫 책입니다. 자신의 근원을 찾아가 자신이 누구인가를 다시 확인한 과정입니다.

그는 별이 반짝이는 극장에서 아득한 시간을 거슬러가 어제의 자신과 오늘의 자신이 이어져 있다는 것, 결국 ‘글 쓰는 작가’라는 사실을 감각적으로 확인했겠지요. 생의 모든 막다른 골목에서도 답은 자기 안에 있다는 것, 안간힘을 다해 스스로 그걸 찾아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만 위안이라면 그의 옛 애인의 말처럼 막다른 골목 같아도 우리 인생에는 아직 우리가 모르는 길이 많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196쪽, 1만2000원.

최현미 기자 chm@munhwa.com
최현미

최현미 논설위원

문화일보 /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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