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여군 기술자들이 최초의 전자식 디지털 컴퓨터인 콜로서스로 작업하고 있다.  영국 국립 보존 기록관·이김 제공
영국 여군 기술자들이 최초의 전자식 디지털 컴퓨터인 콜로서스로 작업하고 있다. 영국 국립 보존 기록관·이김 제공

- 계획된 불평등 / 마리 힉스 지음, 권혜정 옮김 / 이김

女프로그래머 암호해독 활약
2차 대전 승전국으로 이끌어

여성, 출입구·층계 따로 사용
별도의 낙후된 구내식당 이용
저임금· 주요 직무서 늘 배제

업무용 전산기술 인재였지만
단추나 누르는 존재로 폄하


진즉 해가 진 나라였지만, 20세기 들어 영국은 국제 사회에서 이렇다 할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잃어버린 영화를 되찾기 위해 영국은 ‘전산화’에 박차를 가했다. 성과도 있었다. 정부와 기업이 중심이 되어 이룬 전산화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고속 암호해독기를 만들어냈고, 결국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전쟁 후 과도기를 거치면서 반짝했지만, 1970년대 들어 영국의 컴퓨터 산업은 거의 멸종했다.

일리노이공대 마리 힉스 교수는 ‘계획된 불평등’에서 영국의 컴퓨터 산업이 몰락한 이유를 추적한다. 몰락의 이유는 하나, 여성을 차별했기 때문이다. 앨런 튜링이 다 한 것처럼 알고 있지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암호해독 작전은 여성 프로그래머들의 활약이 없었으면 불가능했다. 최초의 전자식 디지털 컴퓨터인 콜로서스(Colossus)가 태어난 곳이자 전쟁 당시 암호해독의 본산이었던 영국 블레츨리 파크에는 기술자로 일하는 여성 수천 명이 존재했었다.

물론 여성이 온당한 대우를 받던 시절이 아니었다. 하지만 더 큰 이유는 영국 정부가 상의하달식으로 전산 기술을 도입하려던 계획 아래 자행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영국의 노동 인구 성별화는 19세기 후반 사무직 노동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부터 노골화되었다. 여성은 출입구와 층계를 따로 사용해야 했고, 별도의 낙후된 구내식당을 이용해야만 했다. 1911년까지 런던 중앙우체국은 여성 노동자들이 점심시간에 구내를 벗어나지 못하게 막았는데, 이유가 가관이다. 젊은 남성 노동자들이 대부분 미혼인 이 여성들과 이성 관계로 발전할 여지를 주지 않기 위해서다. 그럼에도 영국에서 사무직 노동자는 빠르게 증가해, 1970년대는 여성이 사무직 노동자의 70%까지 치고 올라갔다.

그럼에도 여성은 임시 노동자로 인식되었고, 당연히 주요 직무에서 늘 배제되었다. 결혼하면 일을 그만둘 것이라는 인식이 팽배했고, 결과적으로 낮은 임금 정책을 유지하는 한 빌미가 되었다. 이 모든 일에 정부가 앞장섰는데, 여성을 고용하는 대부분의 직군에서 기존 직원을 진급 대신 퇴직시키는 방법으로 오래된 직원을 내보내고 새 직원을 들이는 일을 반복했다. 기계를 다루는 직군에 속한 여성들은 노동조합을 통해 차별의 구속을 벗어나려고 했지만, 전국여성공무원조합 등은 별다른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남성 위주의 ‘사무직공무원조합’이 급여와 복지를 개선하고 여성만으로 이루어진 말단 직급에 젊은 남성을 의무적으로 배치할 것을 요구했고, 쟁취했기 때문이다.

차별은 대외적인 홍보 채널에서도 이뤄졌다. 1950년대 후반, 어엿한 업무용 전산 기술 전문가로 성장한 여성들은 기계 내부를 장치를 조작해 프로그램을 설정할 수 있는 인재들이었다. 그럼에도 여성은 컴퓨터에서 ‘단추를 누르는’ 흉내나 내는 이미지로 잡지 등에 소비되었다.

1960년대 중반 들어 컴퓨터는 이전 기계들을 개선한 기계라는 단순한 인식이 사라지고 정부의 역량을 결정하는 중요한 관리 도구로 발돋움했다. 세금과 건강보험처럼 데이터를 집약적으로 관리해야 하는 정부 부처들은 컴퓨터가 어는 부서에 필요한지, 예산은 얼마나 드는지, 어느 기종을 선택하는지도 결정하지 못하고 일단 사들였다. 여성들이 기계직의 대다수, 사무직의 44%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정부는 이들을 방치했다. 저자는 1968년에 발행된 한 자료 내용을 인용해 “업계에서 늘어나는 기술 수요에 발맞추기 위해 필요한 기술 경력을 갖춘 사람은 늘 부족했지만, 사실상 완전히 방치되어 온 인력 공급처가 여기 있다”고 주장한다. 이미 많은 전문가가 컴퓨터와 관련 업무를 능숙하게 처리할 수 있음에도, 의도적으로 배제된 것이다. 1970년대에 들어서도 이런 현상은 계속되었는데, 저자는 이를 “영국 기술관료제의 실패”라며 신랄하게 비판한다. 컴퓨터를 발명하고 전산 기술을 발전시킨 영국은 성별화된 방식으로 노동 인구를 분리함으로써, 빠른 성장을 통해 나라 경제를 일궈주던 정보 기술 분야에 치명타를 입혔다. 준비된 인재였던 여성들을 외면한 덕분에, 국정 운영 과정에서 닥친 난관을 풀지 못하고 국가 전체의 전산 기술 발전까지 저해한 것이다.

‘계획된 불평등’은 여성 기술 인력을 배제함으로써 20세기 영국의 컴퓨터 산업이 얼마나 몰락했는지 그 이유를 살핀다. 비단 컴퓨터 산업뿐이며, 영국뿐이겠는가. 역사 이래 얼마나 많은 영역에서 여성이 차별받고 배제되었는지 살피면, 인류의 발전이 얼마나 도태되었는지도 밝힐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계획된 불평등’은 20세기 영국의 쇠락 이유를 찾는 책이 아니라 인류가, 발전을 구가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쇠락하고 있는 무수한 이유를 찾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432쪽, 2만2000원.

장동석 출판평론가·뉴필로소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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