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만기 다가오는데 연락두절 알고보니 전세 끼고 20채 굴려 같은처지의 세입자들은 분통만 소송 걸어도 보증금 다 못받아
작년 전세보증금 분쟁 1801건 보증보험 의무가입法은 계류중 돈 안떼이려면 알아서 가입해야
서울 강서구에 거주하는 직장인 A(31) 씨는 오는 9월 전세 만기를 앞두고 속이 타들어 가고 있다. 1년 반 전쯤 집을 계약했던 공인중개사 사무소로부터 최근 ‘집주인이 잠적한 것 같다’는 연락이 온 것이다. A 씨의 집주인인 B 씨가 A 씨의 집을 포함해 서울 강서구와 양천구 일대에서 소위 ‘갭투자’(전세를 끼고 집을 사는 것)로 주택 20여 채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지난해 11월쯤 중개사무소 측에 “잠시 해외에 다녀오겠다”는 말을 남긴 뒤 돌연 연락을 끊고 잠적했다는 것이다. 뒤늦게 이를 알게 된 A 씨 등 세입자들이 B 씨의 휴대전화로 연락하고 집으로도 찾아가 보았으나 전화는 꺼둔 채였고, 주소지로 돼 있는 오피스텔은 텅 비어 있었다.
A 씨와 같은 처지에 놓인 세입자의 숫자는 현재까지 파악된 것만 최소 10가구 이상이다. 서로 연락이 닿은 세입자들은 대부분 같은 중개사무소로부터 비슷한 시기에 B 씨의 물건을 소개받아 계약했다는 것도 알게 됐다. 전형적인 갭투자 물건이었지만 A 씨 등은 중개사무소로부터 이러한 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며 분통을 터뜨리고 있다.
세입자들은 B 씨가 최근 집값이 하락한 데다 세입자들의 전세 만기가 비슷한 시기에 도래하면서 전세보증금을 돌려줄 방법이 없자 잠적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세입자들은 “B 씨가 소유하고 있는 부동산이 몇 채인지, 세입자들은 몇 명이나 되는지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고 했다. 연락이 닿는 세입자들끼리 추산한 전세금액만 16억 원대에 달해 연락이 닿지 않은 추가 세입자들의 전세금을 합하면 수십억 원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세입자들은 법적으로 구제받을 방법을 백방으로 알아봤다. 대한법률구조공단의 주택임대차분쟁조정위원회는 임대인이 조정절차에 응하지 않거나 의사 통지를 하지 않으면 신청이 각하된다. 따라서 B 씨가 계속 연락을 받지 않는 한 최후의 수단인 임차보증금반환청구소송과 경매로 직접 전세보증금을 되찾아야 하는 상황이다. 이 과정을 거치면 최소 1년여간 ‘시간과의 싸움’을 벌여야 한다. 전세금과 매매가의 차이가 수십만 원에 불과한 세입자도 있어 모든 절차를 거치더라도 전세금 전액을 되찾지 못할 가능성도 크다. 전세 만기 후 새로 이사 갈 집을 구해 계약금까지 걸어뒀던 일부 세입자는 계약금마저 날렸다. A 씨를 포함, 연락이 서로 닿은 세입자들은 대부분 30대 초·중반의 사회초년생이나 신혼부부들이다. 집주인이 전세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으면 보증회사가 세입자에게 보증금을 돌려주는 상품인 임대보증금 반환 보장보험에 대해서도 대부분 몰라 가입하지 못했다. 한 세입자는 “가입을 신청했으나 집주인 B 씨의 기존 채무 등 문제를 들어 거절됐다”고 말했다. 이들은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1억~2억 원대의 전세보증금을 되찾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몸서리치면서 소송을 준비하거나 B 씨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다.
세입자들은 서로 ‘단톡방’까지 꾸려 대응 방안을 논의하고 있지만 뾰족한 방법을 찾지 못한 채 불안감만 커지고 있다. 또 다른 한 세입자는 “정부가 하루빨리 해결책을 마련해 집값 하락으로 인한 역풍이 애꿎은 세입자들에게 더 피해를 주는 것을 막아줬으면 좋겠다”고 촉구했다.
이처럼 최근 전세시장 상황이 악화하면서 집주인이 세입자에게 전세보증금을 제때 돌려주지 못하는 ‘역전세난’에 대한 우려는 이미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21일 대한법률구조공단 산하 주택임대차분쟁조정위원회에 따르면 지난해 위원회에 접수된 총 2515건의 분쟁조정 신청 중 71.6%인 1801건이 전세보증금 반환과 관련한 분쟁인 것으로 집계돼 집주인으로부터 보증금을 돌려받게 해달라는 세입자의 조정 신청이 10건 중 7건을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1월 공단에 접수된 주택임대차분쟁조정 신청 건수도 260건으로 집계됐다. 그러나 지난해 임대차분쟁조정위에 접수됐던 2515건 가운데 실제 조정이 이뤄진 경우는 1125건으로 44.7%에 그치고 있다.
집주인이 전세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아서 보증회사가 세입자에게 대신 돌려준 보증금도 1년 사이 4배 이상으로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SGI서울보증이 장병완 민주평화당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와 주택도시보증공사(HUG)의 ‘전세보증금 반환보증 실적’ 자료를 종합하면, 지난해 두 회사가 집주인 대신 세입자에게 돌려준 전세보증금 액수는 1607억 원으로, 2017년 398억 원의 4배 이상으로 증가했다.
한국은행이 19일 발표한 ‘최근 전세시장 상황 및 관련 영향 점검’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1~2월 거래된 전국 아파트 중 전셋값이 직전 계약 시점인 2년 전보다 하락한 비중이 52.0%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지방의 전셋값 하락 비중은 60.3%였고, 서울은 28.1%, 수도권은 46.5%로 나타났다. 전셋값이 10% 하락하면 전체 임대 가구의 1.5%인 3만2000가구는 금융자산을 처분하거나 추가 대출을 받더라도 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할 것으로 분석됐다.
김현아 자유한국당 의원 등은 지난 2016년 9월 임차인의 조정 신청만으로도 임대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조정절차가 개시될 수 있도록 하는 내용과 6억 원 이하의 전세계약 시 임대보증금 반환 보장보험에 의무 가입하도록 하는 내용으로 각각 주택임대차보호법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현재까지 국회에 계류 중이다.
김 의원은 “정부는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보고 가볍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전세보증금 반환 관련 분쟁을 집주인의 도덕적 해이로만 여기고 있는데 이제 정부가 적극적으로 실태 파악에 나서야 한다”며 “주관 부처인 국토교통부가 의지를 갖고 법안을 밀어붙이면 되는데 정부는 중산층의 자산에 대한 보호 의지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