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훈 前 외교부 통상교섭본부장

소득 3만 달러지만 과제 첩첩
농산물 개도국 지위 힘들어져
美 ‘혜택 불허 4조건’ 모두 해당

지금은 혁신 경쟁에서 뒤처져
ESS, 데이터, 5G 분야 상징적
기업 환경 악화로 후진할 우려


지난해 우리나라 1인당 국민총소득(GNI)이 3만 달러를 넘었다. 6·25전쟁 후 최빈국 가운데 하나였던 우리나라가 이런 성과를 이룬 데에는 경제주체들의 각고의 노력이 있었다. 그러나 2006년 2만 달러 진입 후 12년이 걸린 것은, 우리보다 앞서간 나라들이 더 짧은 기간에 달성한 사실에 비춰 자랑할 일은 아니다. 더구나 근년 우리 경제성장률이 2% 중후반을 오르내리고, 초저출산의 심각한 상황까지 나타나고 있어 나라의 앞날이 결코 탄탄치 않다.

여기서 두 가지만 짚어보고자 한다.

첫째, GNI 3만 달러를 넘어섰으니 우리나라는 이제 선진국일까? 그간 정부는 우리나라가 받던 나라에서 주는 나라로, 또 최근에는 인구 5000만이 넘는 나라로서 3만 달러를 돌파한 7번째 나라로 홍보를 해왔지만, 정작 대한민국이 선진국임을 스스로 인정하고 공포한 바는 없다. 아직 국제사회에는 선진국이 되는 요건을 명시적으로 정립한 바가 없어서, 각국의 자기선언(Self-declaration)에 맡기고 있다. 1996년 선진국클럽이라고 부르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하면서 우리는 특히 농업에서는 개도국 지위를 유지하겠다는 조건을 달았다.

이후 국제 무역협상에서 우리나라는 공산품 협상에서는 선진국 그룹에 참여, 개방과 높은 자유화를 추구했다. 그만큼 제조업에서는 경쟁의 자신감을 가졌던 것이다. 그런데 농산물 협상에서는 개도국 그룹의 일원이 돼 ‘특별하고 차별화된 혜택’을 받으려 했다. 국내에서 농산물 시장 개방에 대한 경제적·정치적 민감성에 비춰보면 개도국이 누리는 혜택은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이점임이 분명하지만, 국제사회에서는 양다리 처신이라는 눈총을 받을 수밖에 없다.

주요 2개국(G2)으로 행세하면서 미국을 따라잡겠다고 공언하는 중국이 개도국 지위를 유지하며 에누리 혜택을 받는 데 대해 미국이 세계무역기구(WTO) 개혁 의제 중 하나로 문제를 제기했다. 이달 초에 △OECD 회원국이거나 △G20 일원이거나 △세계은행의 분류에 따라 고소득 국가거나 △세계 무역의 0.5% 이상을 차지하거나 이 4가지 중 하나라도 해당하면 개도국 혜택을 주지 말자는 요지의 제안서를 제출한 것이다. 그간 다양한 논의가 여러 국제기구에서 있었던 점에 비춰 위 4가지 모두 해당하는 한국으로선 국가 차원의 논의와 대비가 있어야 한다. 명실공히 선진국이 돼 개도국 혜택이 정지될 경우 농업에서 구조조정이 불가피할 것이며, 선진국 위상에 걸맞은 개도국에 대한 지원 분담도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우리는 1만 달러에서 2만 달러에 이르는 데 12년, 2만 달러에서 3만 달러로 오는 데 또 12년이 걸렸다. 빈 잔에 물이 콸콸 쏟아져 들어오는 듯했던 고도 성장시대에는 저렴한 생산요소의 물량 투입만으로도 열심히 땀만 흘리면 소출을 쥘 수 있었다. 지난 24년은 이 방식이 서서히 바뀌어온 시간이었고 그 시간은 남들보다 길었다. 그만큼 우리가 새로운 패러다임에 적응하고 스스로 혁신해 가는 데 남들보다 빠르지 않았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툭하면 머리띠 두르고 길바닥으로 나서는 식이면 더욱더 안 된다.

최근의 3가지만 예를 들겠다. 우선, 새로운 먹거리 산업으로 주목받는 에너지 저장장치(ESS)는 정부의 신재생에너지 확산 정책에 따라 관련 설비들이 우후죽순처럼 만들어졌지만, 부실한 안전관리로 화재가 잇따랐고, 결국 지금 전국 1300여 ESS 설치 사업장 중 반 이상이 가동을 멈췄다. 다음으로, 4차 산업혁명이 도래해 많은 나라가 데이터의 흐름과 활용에 관한 제도를 정비하고 있는데 우리는 데이터 활용과 개인정보 보호 사이에 균형 있는 제도를 만들자는 논의 자체도 미약한 상태다. 끝으로, 5G 통신으로 초고속 데이터 이동 시대를 열려면 당연히 새로운 중계기들이 곳곳에 세워져야 하는데 이는 기업들의 투자만으로 가능하다.

기업들은 투자하면 최소한 원가는 건질 수 있어야 하고, 당연히 새로운 통신 서비스에 상응하는 요금 체계를 놓고 기업 간 경쟁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정부가 요금의 적정성을 따져 보겠다는 것은 후진적일 뿐 아니라 투자의 적시성에 걸림돌이 되고, 시장에서의 경쟁도 왜곡시키는 일이다. 이런 식이면 기업 하기 좋은 나라 되기는 어렵고 ‘4만 달러를 향하여’는 고사하고 제대로 선진국 되기도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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