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신대 김용옥 교수의 KBS 한국현대사 관련 특강 논란이 일파만파를 일으키고 있다. 그는 북한을 인간 지옥으로 만든 김일성과 똑같이 건국 대통령 이승만을 ‘미국의 괴뢰’라고 부르고, 국립묘지에서 파내버려야 한다는 반인륜적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시청자들은 공영방송 KBS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이런 발언을 방영했다는 사실에도 분노하고 있다.
탈냉전 후 공개된 극비 소련 문서들을 보면 김일성은 소련의 ‘괴뢰’였음이 분명하다. 1945년 8월 9일 소련은 얄타협정에 따라서 150만 대군을 이끌고 만주와 북한 지역으로 물밀 듯 밀려 들어와 8·15 해방 전에 이미 북한 전역을 장악했다.
소련군이 북한을 점령한 후 김일성은 9월 19일 소련 장교복에 소련 군함을 타고 북한에 들어왔다. 다음날 스탈린은 소련의 ‘괴뢰’ 역할을 할 수 있는 인물을 골라 하루빨리 북한에 단독정권을 수립할 것을 지시했다. 김일성은 국제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의 꼭두각시로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북한 공산화에 앞장섰다. 스탈린이 북한 헌법조차 모두 써 주었다는 사실이 공개된 극비 소련 문서에 의해 드러났다.
이승만 박사는 존 하지 중장이 이끄는 미군정과 사사건건 대립했다. 국무부의 훈령을 받은 미군정은 남한 현지에서 좌우합작을 하고 소련과 협상해 통일정부를 세우려 했다. 9월 20일 극비 지령문에서 스탈린이 북한에 소련 국가이익에 봉사할 수 있는 단독정권을 수립하라고 지시했기 때문에 미·소 간의 합의는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이승만은 미국의 대소(對蘇) 유화정책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미국과 갈등을 빚었다. 그의 입장은 김일성과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김일성은 ‘소련의 괴뢰’라고 부를 수 있지만, 이승만을 ‘미국의 괴뢰’라고 절대로 부를 수 없는 이유다.
1947년 3월 대소(對蘇) 봉쇄정책인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되면서 미국은 이승만 비판에서 지지로 입장을 선회했다. 북한의 남침으로 발발한 6·25전쟁의 휴전 협상이 교착 상태에 빠졌을 때, 미국의 반대에도 이승만 대통령은 반공포로를 석방했다. 미국은 ‘에버레디(Plan Everready)’라는 이승만 제거 작전을 만들었을 정도였다. 이승만은 미국의 조기 휴전에 반대하는 입장에서 미국을 압박해 한·미 방위조약을 끌어냈다.
대서사시 ‘오디세이’의 주인공 오디세우스는 항해 중 머리가 6개인 괴물 스킬라와 하루 3번 물을 빨아들이는 소용돌이 카리브디스가 좌우에 있는 계곡에 이르렀다. 전진하기 위해선 반드시 이 계곡을 지나야 한다. 카리브디스 쪽으로 가면 모두 죽기 때문에 그는 스킬라 쪽을 택했고, 6명의 부하만 괴물에게 잃었다.
1946년 남한에서 단독정권 수립을 주장한 ‘정읍연설’로 알려진 ‘이승만 독트린’은 대서사시 속 오디세우스가 처한 딜레마와 같다. 소련에 의한 한반도 전체의 적화냐, 아니면 남한에 자유민주주의 단독정권을 수립할 것이냐 하는 갈림길에서 이승만은 후자를 택한 것이다. 그의 전략적 선택이 아니었다면 오늘날 한국인은 대한민국이라는 ‘자유(自由)의 보금자리’에서 삶을 누릴 수 없을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대적 소명을 다했는지 여부가 국가 지도자 평가의 기준이 돼야 한다. 해방 이후 이승만 박사에게 주어진 과제는 자유민주주의 이념에 기초한 대한민국의 건국이었다. 그는 확고한 신념과 탁월한 전략을 바탕으로 자신의 소임을 다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없었다면 오늘날 한국인은 자유를 누리고 살 수 없을 것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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