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숙 논설위원

미국의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86) 연방 대법관이 대중의 아이콘으로 인기를 얻고 있다. 그의 삶을 다룬 영화 ‘세상을 바꾼 변호인(On the basis of sex)’이 선보인 데 이어 다큐멘터리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RBG), 나는 반대한다’도 개봉됐다. TV 풍자 프로그램인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SNL)’에는 그를 패러디한 코너까지 등장했다. SNL에서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나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이 단골 풍자 대상이었다는 점에서 긴즈버그의 인기는 거의 대선주자급이다. 정계에선 그의 건강이 초미의 관심사다. 대법원 이념 지형이 보수 5 대 진보 4로 나뉜 상황에서 그의 건강은 곧 대법원 구도 변화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최근엔 사망 오보 소동도 있었다.

긴즈버그는 젊은 층에서 ‘노터리어스(악명 높은) RBG’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래퍼 ‘노터리어스 BIG’를 패러디한 것인데, 뉴욕대생 셔나 크리즈닉 등이 만든 팬 카페 명칭인 동시에 긴즈버그 전기의 책 제목이기도 하다. 근엄하고 권위적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대법관이 대중의 사랑을 받는 것은 이례적 현상이다. 그의 얼굴이 그려진 머그잔과 티셔츠 등도 불티나게 팔린다. 미 언론들은 긴즈버그가 주목받게 된 것은 그가 추구해온 평등과 공정의 가치가 트럼프 시대에 특별한 울림을 주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차별과 혐오, 분노로 뒤덮인 트럼프 대통령 때문에 긴즈버그의 진지하고, 성찰적인 태도가 빛을 발한다는 분석이다.

포브스는 최근 긴즈버그의 리더십 원칙을 다섯 가지로 꼽았다. 전략적일 것, 목표에 집중할 것, 장기적 관점을 가질 것, 상대와의 공동 기반을 마련할 것, 집요하게 추구할 것 등이다. 남녀 차별이 당연시되던 시대에 태어난 긴즈버그가 두 아이를 키우며 법대 교수가 됐고, 대장암·췌장암·폐암까지 앓으면서도 26년째 대법관으로서 모든 종류의 차별 철폐에 목소리를 내온 것은 이 같은 원칙 덕분이라는 것이다.

긴즈버그는 진보도 아니고 보수도 아니다. ‘법을 통해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든다’는 목표로 때로는 진보, 때로는 보수의 편에서 소수 의견을 냈고, 그것을 다수 의견으로 만들기 위해 힘썼을 뿐이다. 긴즈버그 삶의 궤적을 보면서 적폐 몰이와 코드화로 만신창이가 된 ‘김명수 대법원’이 떠올랐다. 긴즈버그는 정치권력 개입을 자초한 현 사법부를 더욱 부끄럽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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