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3년 10월 27일 자정 미국 볼티모어 올리벳산 공동묘지에서 여러 발의 총성이 울렸다. 경비원들이 도굴꾼들을 향해 쏜 총이었다. 과학자들에게 뒷돈을 받은 도굴꾼들이 노린 것은 팻 브라이드라고 불린 신부, 블랜치 그레이의 시체였다. 많은 과학자가 프릭쇼(기형인 동물과 사람들을 보여주는) 서커스단의 인기스타였던 그녀의 시신을 탐낸 이유는 그녀의 몸무게 때문이었다. 그녀의 몸무게는 230㎏이었다. 그레이가 100년 후에 태어났다면 의사들은 호르몬 검사를 통해 비만과 관련된 다양한 호르몬 결함을 찾아냈을 것이다. 만약 2000년쯤 태어났다면 렙틴과 그렐린 호르몬 검사를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호르몬이 발견되기 전, 과학 이전의 세상에 살았다.
미국의 의사 겸 작가가 쓴 이 책은 호르몬에 대한 제대로 된 역사책이자 과학책이다. 피임약, 성장호르몬, 스테로이드 등 실제로 쉽게 접하는 호르몬의 역사, 정확하게 호르몬 발견의 역사를 풀어낸다. 무엇보다 이 책의 뛰어난 점은 이 과학적 발견의 역사에 등장하는 과학자, 팻 브라이드처럼 연구 대상이 된 이들, 놀랍고 기괴하기까지 한 다양한 실험을 등장시켜 소설보다 더 흥미로운 이야기로 풀어내는 뛰어난 스토리텔링이다. 정력을 높여주겠다며 환자들에게 유인원과 염소의 고환을 이식하고, 간성으로 태어난 아이를 아무런 고지도 없이 여자아이로 만든 수술, 검증되지 않은 성장호르몬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은 케이스 등 숱한 ‘미친 실험’도 보여준다. 키 작은 아들을 위해 병리학 연구실과 영안실을 샅샅이 뒤져 성장호르몬을 구한 부모처럼, 필사적인 부모들의 이야기도 담겨 있다.
이 같은 위대한 발견과 과학의 역사를 얼룩지게 한 ‘미친 시도’들을 엮어 풀어내는 이야기 속에서 저자는 호르몬이 성 분화, 키, 질병, 증오와 사랑 같은 감정, 포만감, 성욕 등에 미치는 영향을 보여준다. 남성도 여성도 아닌 간성인(intersex)의 삶을 보여줌으로써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법적 성별 관념에 대해 성찰하게 한다.
책은 호르몬이 우리의 신체부터 기분까지, 거의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보여주면서 호르몬이야말로 우리 몸의 주인이며, 호르몬을 모르고선 우리가 과연 누구인지를 알 수 없다고 말한다. 452쪽, 1만9800원.
최현미 기자 ch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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