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 부국장 겸 정치부장

대세론이 毒 됐던 이회창 교훈
쓴소리 귀 닫고 대중 요구 외면
우수한 상품성에도 대선 패배

黃대표 주변에도 데자뷔 현상
리더십과 도덕성 검증도 없이
人의 장막 쳐지면 실패 되풀이


1998년 서울 종로구 국회의원 보궐선거는 2년 전 총선에서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패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재기의 발판을 마련한 선거로 유명하다. 그런데 비화가 있다.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 상실 위기에 몰린 이명박은 의원직을 사퇴하면서 이회창 당시 명예총재의 출마를 제안했다. 1997년 12월 대선에서 김대중 대통령에게 석패한 이회창이 정치 1번지에서 당선되면 차기 대권 경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선점할 수 있다는 설명에 이회창은 출마를 결정했다.

그러나 후보 등록 직전 포기했다. 노무현이 출마해 이회창 장남의 병역 비리 의혹 등을 제기하려고 벼르고 있어 대선 패배 1년도 되지 않은 시점에서 다시 정치적 상처를 입으면 차기 행보에 차질을 빚게 된다는 계산 때문이었다. 결국 노무현의 정치적 성장을 막고 병역 비리 의혹도 미리 걸러낼 수 있는 기회를 날린 셈이 됐다. 이런 셈법 덕에 국회에 입성한 노무현은 2002년 대선에서 이회창을 57만여 표 차이로 눌렀다.

종로 보궐선거의 교훈은 두 가지다. 첫째, 대세론에 안주하는 정치인은 성공할 수 없다. 대세론의 핵심은 여론조사로 대표되는 지지도다. 그러나 여론은 변덕스럽다. 오늘의 지지율이 내일의 지지율을 담보해주지 않는다. 상품성이 시원치 않아도 높은 지지율이 나올 수 있고 작은 의혹에도 지지율이 곤두박질칠 수 있다. 둘째, 인의 장막에 둘러싸인 리더는 반드시 실패한다. 종로 보궐선거 당시 이회창 주변에는 10상시(중국 한나라 때 정치적 농간을 부린 10명의 환관)로 불리던 중진·원로 의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이들은 오랜 법관 생활로 대중 친화력에서 한계를 보인 이회창의 심기에 맞춰 일정과 메시지를 기획했다. 이회창은 점차 당 안팎의 쓴소리에 귀를 닫았고 인의 장막은 더 두꺼워졌다. 그 결과 이회창은 ‘여의도 대통령’이란 칭송에 빠져들었고 대중의 요구와 시대정신에서 멀어져갔다.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의 상품성은 당시의 이회창에게 뒤진다. 이회창은 개혁 성향 법관이었고, 감사원장과 총리로 임명된 이후에는 김영삼 당시 대통령과 맞서며 ‘대쪽’ 이미지를 굳혔다. 반면 황 대표는 보수 성향이 강하고, ‘대쪽’ 이미지 대신 ‘탄핵총리’라는 멍에를 메고 있다. 그러나 황 대표의 대세론 확산 속도는 이회창 못지않다. 지난 3월 29일 발표된 리얼미터 여론조사 결과, 황 대표는 차기 대선주자 선호도에서 21.2%의 지지를 받아 보수·진보 진영 통합 1위를 기록했다. 2위인 이낙연 총리보다 6.3%포인트 앞섰다. 보수·야권·무당층에서는 무려 38.5%를 차지해 2위인 오세훈(6.1%) 전 서울시장을 6배 이상으로 앞섰다. 한국당 입당 73일 만에 받은 성적표다.

당내 상황도 이회창의 전철을 밟을 개연성을 보여준다. 대표 취임 이후 단행한 당직 인사나 특보단 인선에서는 혁신과 정치적 상상력을 찾아보기 어렵다. 측근 그룹으로 거명되는 인사들의 영향력은 나날이 커진다.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거치면서 되풀이된 공천 학살로 DNA에 ‘줄서기’ 습성이 새겨진 한국당 의원들은 벌써 ‘황교안계’를 자처하기에 바쁘다. 당내에서 황 대표를 견제할 세력도, 비판하는 목소리도 찾아보기 힘들다. 황 대표가 내년 총선 공천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리라는 관측도 자연스럽다. 문재인 정부가 현재의 국정운영 기조를 유지하는 한 내년 4월 총선에서 야당이 승리할 수 있다고 한국당은 보고 있다. 그때 황 대표는 이회창보다 더 큰 권력을 누리고 더 높은 인의 장막에 둘러싸이게 된다. 자신의 리더십을 제대로 입증하지 않고, 도덕성과 자질에 대한 치열한 검증도 거치지 않은 채 대선 선두권 주자로 부상하게 된다.

차기 대선은 내전 수준으로 치러질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진보 진영은 보수 진영에 정권을 넘겨주면 엄청난 보복을 받을 것을 우려해 집권세력으로서 동원 가능한 모든 자원을 쏟아부을 것이고, 보수 진영은 진보 진영이 정권을 재창출하면 존립과 국가 정체성이 위협받을 수 있다고 판단해 총궐기한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민주선거의 기본 원칙들이 위협받을 수 있다. 특히, SNS의 발달로 가짜 뉴스가 선거 결과를 좌우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따라서 대세론에 안주해 자의든 타의든 자신을 입증하고 검증할 기회를 갖지 못한 후보는 어느 한순간 사소한 의혹에도 유리알처럼 부서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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